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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송(頌)
그가 돌아왔다
돌아와
그의 옛집 사립문으로 들었느니
단지 이 사실이
밤마다 나의 침상에
촛불을 밝힌다
말하지 말자
말하지 말자
제 몸 사루는 불빛도
침묵뿐인 걸
그저
온 마음 더워오고
내 영혼 눈물 지우느니
이슬에 씻기우는
온누리
밤의 아름다움
천지간 편안하고
차마 과분한
별빛 소나기
그가 돌아왔다
오세영, 봄
봄은
성숙해가는 소녀의 눈빛
속으로 온다
흩날리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봄은
피곤에 지친 청춘이
낮잠을 든 사이에 온다
눈 뜬 저 우수의 이마와
그 아래 부서지는 푸른 해안선
봄은
봄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의
가장 낮은 목소리로 온다
그 황홀한 붕괴, 설레는 침몰
영혼의 깊은 뜨락에 지는 낙화
한하운, 자화상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기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 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이장욱, 겨울의 원근법
너는 누구일까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떨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소리 없이 내린다는 것
나는 너의 얼굴을 토막토막 기억해
네가 나의 가장 가까운 곳을 스쳐갔을 때
혀를 삼킨 입과 외로운 코를 보았지
하지만 눈과 귀는 사라졌다
구두는 태웠던가
너는 사슴의 뿔과 같이 질주했네
계란의 속도로 부서졌네
뜨거운 이야기들은 그렇게 태어난다
가까운 눈송이와 먼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나는 겨울의 원근이 사라진 곳에서 너를 생각해
이제는 아무런 핵심을 가지지 않은
사슴의 뿔이 무섭게 자라는
이 완전한 계절에
조명암, 칡넝넝
하늘이 하도 높아 땅으로만 기는
강원도 칡넝쿨이
절간 종소리 숙성히도 자라났다
메뚜기 배짱이들이
처갓집 문지방처럼 자조 넘는 칡넝쿨
넝쿨진 속에 계절이 무릎을 꿇고 있다
여름의 한나절 꿈이 향그럽다
줄줄이 뻗어간 끝엔
뾰죽뾰죽 연한 순이 돋고
어린 소녀의 사랑처럼 온 칡
모르게 모르게 무성해 간다
가사(袈裟)를 수한 젊은 여승이
혼자 다니는 호젓한 길목에도
살금살금 기어가는 칡넝쿨이언만
해마두 오는 가을을 넘지 못해
목을 움츠리고 뒷걸음을 치는 식물
칡넝쿨이 안보이면
먼뎃절엔 등불이 한 개 두 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