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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성, 길은
길은
조그마한 역사처럼
바다로 떨어지는 벼랑 위에 와서
끊어져 있다
하루도 다 끝나는 붉은
석양 속에
길게 뻗친 묘표(墓標) 그림자
그 그림자 위에 나무가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연습이 아니었다
무엇을 배반하려는 듯
아무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는
얼굴
신동집, 집을 짓다
가을도 다 감에 따라
앙상한 뼈대도 이제사 좀
무어다워진다
땅에는 돌멩이랑 깨어진 기왓장이 낭자한데
구질한 아무개 시(詩)와 같다
방이 되고 땅이 골라지기엔
아직도 많은 손발이 필요하나
그런대로 이번 일이
나에게도 무슨 기연(機緣)이 되어주기 바라지만
사주(四柱)는 죽은 정도령(鄭道令)이나 알까
덜 마른 핏덩이의 목을
뒷전의 검은 손이 쥐고 있다
그런대로 춥기 전에 문도 어서 달고
책상도 제 머리에 놓아야겠는데
그것은 해야 할
무서운 의무(義務)처럼 나를 불안(不安)케 한다
피물 묻은 연대(年代)처럼 어언 10년을 넘어가고
여기 한두 잔의 물을 마시며
남은 자(者)는 존재(存在)의 집을 짓는다
사자(死者)는 또 한 번 지붕이 소용없지만
저무는 가을이여
상(傷)키 쉬운 나의 시(詩)에 가혹(苛酷)하지 말라
양소연, 가을의 별
계절의
마지막 몸부림을
조심스레 밀어 보는 쓸쓸한 바람
그가 놀이터 귀퉁이에서
추억을 담아
낡은 그네를 탄다
바닷가 아름다운 파도와
푸르른 산의 나뭇잎새는
그네를 타고 올라
밤하늘 반짝이는 별이 된다
오늘은 유난히도 별이 많다
박양균, 낙과(落果)
떨어지는 과일은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만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게다.
내가 그것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힌 채 쉽사리 주워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은
그 무게나 속도만큼의 숨자리를 찾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리질을 하다가 한이 덜 찬 어린 것이
그대로 잠이 든 베갯머리에서 내가 미소 지으며
낙과(落果)의 빈 허허로움에 한참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으로 따진다면 청승스러울 만치 고요한 어린것의 숨자리도
차라리 떨어져 한줌 소리로 남는 과일의 생성에 비길 것으로
내 이제 숙연히 그 어린것의 베개맡을 지키지 못하고 미열을 느끼는 것은
이승의 소리로 하여 충만하는 산 것의 무게만큼이나
따사로움에 끝내는 과원(果園)을 벗어나지 못하고
때를 이렇게 허리를 굽혀 떨어진 과일을 쉬 주워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홍영철, 어두워질 때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형광등을 켠다
형광등을 켜고 종이와 볼펜을 찾는다
형광등은 간신히 켜지고 종이와 볼펜은
간신히 찾긴다. 간신히 켜지고
간신히 찾기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렇다, 어제 내린 비로 길은 아직 질퍽하다
질퍽한 길을 나는 내일 아침 걸어가야 한다
돌아올 길이지만 걸어가야 한다
그렇다, 돌아올 길을 또
걸어가야 하는 까닭을 생각해보자
하얀 구름
작은 무지개를 감추고 섰는
하얀 구름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즐거운 노래 노래는 언제나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도 돌려준다
만질 수 없는 네 가슴
바보 같은 시간
바보 같은 꿈
한밤중에 일어나 시를 쓴다
무엇을 어떻게 왜
시를 쓰는가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왜 늘 이 모양인지도
생각해보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거냐고
생각해보자, 우리 시대의 사랑과 자유를
생각해보자, 다시 또 깨어 있음이
어두워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