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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가신 누님
강남 제비 오는 날
새 옷 입고 꽃 꽂고
처녀 색시 앞뒤 서서
우리 누님 뒷산에 갔네
가서 올 줄 알았더니
흙 덮고 금 잔디 덮어
병풍 속에 그린 닭이
울더라도 못 온다네
섬돌 위에 봉사꽃이
피더라도 못 온다네
김현구, 입추(立秋)
어젯 밤
불현듯 서해(西海)에 풍랑(風浪)이 일어
오늘 아침
천지가 왼통 요란스럽습니다
하늘에 구름은
한층 바삐 달음질치고
수목(樹木)들이
슬픈 몸짓으로 설레입니다
난데없는 소란에 황겁한 꾀꼬리
몸을 감추고
숲속 소스라쳐 깨인 벌레 소리
하늘에 가득찹니다
아아 영혼의 슬픈 유랑(流浪)과
조락(凋落)의 붉은 상장(喪章) 몸에 두르고
가을이 산을 넘어
찾아옵니다
홍윤숙, 7월의 비극
산도 들도 바다도 모두 다 불붙는 사막입니다
저희는 지금 땀 펑펑 쏟으며 마른 입술 헉헉대며
죽을 힘 다하여 삼복의 사막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가라지도 밀도 한데 엉켜서 사막 끝에 닿을 오아시스를 향해
그러나 그때 뽑혀나갈 가라지 너무 불쌍합니다
다 함께 이 고난의 시절을 넘어 왔는데
하종오, 질경이
질경이는 밟혀서 자란다
먼지 이는 길가에서도 먼지를 잠재울 줄 알며
자갈 하나에 깔려서도
질경이는 대지의 힘을 얻는다
밟히면 밟히면 눕고 눕고
잠시 누웠다가 기어코 일어나는 끈기
콱콱 밟힐수록 밟힐수록
뿌리 뻗어내는 뿌리 뻗어내는 뚝심
질경이는 잎을 포개고
벌레를 쉬게 하지만
잎만으로 뜬 세상을 살지 않는다
우리가 맨몸으로 살아가며
가꾸는 어린 목숨도
쓰러지고 일어날 때 튼튼해지는 기쁨
봄 아침에 풋풋하게
질겨지는 질경이
최두석, 철원평야
내 마음속에 구름 모이고 흩어지는
철원평야 같은 너른 벌판이 있어
때로 폭우 쏟아져
한탄강 같은 강물이 격류로 아우성치기도 하고
때로 폭설이 내려
지상의 모든 길이 끊기는 눈 나라가 되기도 하는데
폭우 속에서도 백로는 알을 품고
폭설 속에서도 두루미는 새끼를 기르나니
나 세상일에 하염없이 슬퍼질 때
부엉이 되어 찾아가 밤새워 우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