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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땅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푸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黃昏)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 위에
은하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언제까지나 작별(作別)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位置)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문인수, 식당의자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앞에
흰 플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이영광, 저녁은 모든 희망을
바깥은 문제야 하지만
안이 더 문제야 보이지도 않아
병들지 않으면 낫지도 못해
그는 병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전력을 다해
가만히 멈춰 있기죠
그는 병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병이 좋은가
왜 나는 내 품에 안겨 있나
그는 버르적댄다
습관적으로 입을 벌린다
침이 흐른다
혁명이 필요하다 이 스물네 평에
냉혹하고 파격적인 무갈등의 하루가
어떤 기적이 필요하다
물론 나에겐 죄가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벌 받고 있지 않는가, 그는
묻는다, 그것이 벌인 줄도 모르고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불탄다
새날이 와야 한다
나는 모든 자폭을 옹호한다
나는 재앙이 필요하다
나는 천재지변을 기다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
짧은 아침이 지나가고
긴 오후가 기울고
죽일 듯이 저녁이 온다
빛을 다 썼는데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안 된다
저녁은 모든 희망을 치료해준다
그는 힘없이 낫는다
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무장봉기를 꿈꾸지 않는다
대홍수가 나지 않아도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하늘을
덮지 않아도 좋다
나는 안락하게 죽었다
나는 내가 좋다
그는 돼지머리처럼 흐뭇하게 웃는다
소주와 꿈 없는 잠
소주와 꿈 없는 잠
김광림, 풍경
기중기는
망가진 캐시어스 클레이의 철권 수만 개를
들어올린다
흔들린다
헛기침도 않고
건달 같은 자세로
시장한 벽에
부딪힌다
압도해오는 타이거 중전차에
거뜬히 육탄한다
나를 매달아 놓았던 내장의 사슬이 끊어진다
기중기를 벗어난 철추는
현실 밖으로 뛰쳐 나간다
한 마리의 새가
포물로 날아간다
박태진, 안개
어느 날
자하문 밖의 아침은
돌산을 반쯤 가린 안개
나도 반쯤은 가리운 평생(平生)이기에
돌산의 버릇을 닮고 있는가
좀씩 피로를 느끼는 나이에도
마무리 없이 잇달은 나의 문제들
하기야 그런대로 멀어는 갈 테지
안개처럼 언제나
나라는 한없는 서장(序章)처럼
이 속에 보이면서
보이잖는 내가
진정한 나였을까
뿌옇게 겹쳐 오는 세월(歲月)들을
나는 핏속에 느끼기는 하면서
고작 알만큼 아는 것이 삶이려니
남저지는 안개 낀 여로(旅路)의 낙수(落穗)
내가 살아온 생각들이 한동안
멀어져 가는 그 숱한 얼굴들 틈에
나의 아픈 얼굴도 다시 안개에 묻자
끝내는 언젠가처럼 못다 한 이대로
서장(序章)으로 그칠 그 골짜기
다시 어느 날의 안개일 테지
방금은 봉우리 화사한 흰 목련(木蓮)
북악(北岳)을 햇살 맞아 걷히는 안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