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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리, 산그늘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 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류시화, 가을 유서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시작 노트 위에
마지막 눈 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 새 하얗게 돌아서 버린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폐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 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 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내어 읽으리라
안도현, 살아남은 자의 슬픔
비닐 조각들이 강가의 버드나무 허리를 감고 있다
잘 헹구지 않은 수건처럼 펄럭거린다
몸에 새겨진 붉은 격류의 방향
물결무늬의 기억이 닮아 있다
모두들 한사코 하류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김동명, 밤
밤은
푸른 안개에 싸인 호수
나는
잠의 쪽배를 타고 꿈을 낚는 어부다
이수진, 왜 그랬나요
길바닥에 누워버린 들꽃처럼
바람에 지쳐버린 나무처럼
짐도 없지. 짐도 없지
그 저 그저 살아온 거지
버릴 것도 없고
이룰 것도 없고
배 따뜻하면 만족하지
더 딘 더딘 아이처럼
발끝마다 가시가 솟아나도
울면 그만이지. 울면 그만이지
얼음 속에 눈 녹아 들어가듯
추운 마음 익숙하여
울 수도 없었지
그저 흉내 낸 거겠지
시계바늘 돌아가듯
익숙한 하루태엽들
버젓이 내게 감기며
하루하루 노래하며 지내는
베짱이 신세였지
그래 그게 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