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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다시 살구꽃 필 때
옛 외갓집 살구나무 꽃 필 때
이모는 아궁이 속에서 굴러나온
달을 품고 잠이 들었다
곤곤한 달빛 위로 흰 발목이 둥둥 떠다니며
장독마다 차오르는 물소리를
내 어린 풋잠은 엿들었던 것이니
그런 날이면 한밤중에도
오줌보가 탱탱하게 부풀어 올랐다
문풍지를 스미는 희미한 향기
먼 우주의 물고기가 안마당까지 몰려와
하얗게 알을 슬어놓고 가기도 하는 것인데
꽃잎 떨어진 자리마다 눈 맺혀
돋아나는 초승달
벌겋게 달아오른 외할머니의 아궁이가
한밤 내내 식을 줄 몰랐다
둥그스름 달집 딸아이의 몸속으로
벌건 숯불은 다시 지펴져
봄밤의 구들 뜨겁게 달구어낸다
박형준, 지붕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김사인, 딸년을 안고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다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이동순, 쇠기러기의 깃털
쇠기러기 한 마리
잠시 앉았다 떠난 자리에 가보니
깃털 하나 떨어져 있다
보숭보숭한 깃털을 주워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는
이런 깃털조차 하나 없을 것이다
하기야 깃털 따위를 남겨 놓은들
어느 누가 나의 깃털을 눈여겨보기나 하리
장철문, 거기 가 쉬고 싶다
그대 영혼의 아름다운 빈터
거기
바람 설레는 데
터잡을 데 없는 씨앗들 와서
떡잎 틔우고 꽃 피우는 데
도둑제비 쉬어가고
바랭이 쇠비름 욱은 데
거기
부엉이 낮에 울고
풀무치 날고 패랭이 꽃 피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