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의혹의 기(旗)
얇은 고독처럼 퍼덕이는 기
그것은 주검과 관념의 거리를 알린다
허망한 시간
또는 줄기찬 행운의 순시(瞬時)
우리는 도립(倒立)된 석고처럼
불길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낙엽처럼 싸움과 청년은 흩어지고
오늘과 그 미래는 확립된 사념이 없다
바람 속의 내성(內省)
허나 우리는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피폐한 토지에선
한줄기 연기가 오르고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았다
최후처럼 인상은 외롭다
안구(眼球)처럼 의욕은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중간의 면적에
우리는 떨고 있으며
떨리는 깃발 속에
모든 인상(印象)과 의욕은 그 모습을 찾는다
195…년의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애정의 뱀은 어두움에서 암흑으로
세월과 함께 성숙하여 갔다
그리하여 나는 비틀거리며
뱀이 들어간 길을 피했다
잊을 수 없는 의혹의 기
잊을 수 없는 환희의 기
이러한 혼란된 의식 아래서
아폴론은 위기의 병을 껴안고
고갈된 세계에 가라앉아 간다
김승희, 손바닥
파초 잎처럼 위로 그냥 펼쳐진
두 손바닥
대 평화다
내 품안에 거하신 아버지가 점점 빠져나가고
얼굴도 점점 지워진다
이태극, 교차로(交叉路)
선과 선의 흐름이여
손과 눈의 견줌이여
여기는 네거리
네 내가 섰는 곳
우러러 구름길 보다
발길 다시 옮는다
그래 밝고 흐림의
지울 수 없는 교차로
웃다 울다 가는
삶의 도가니 속
굽어서 날빛을 찾는
발길 다시 옮는다
나태주, 우포늪 왜가리
너무 크고 푸진
왜가린갑드라
너무나도 슬프고 눈부신
어머닌갑드라
글쎄, 우포 민박집을 코앞에 두고서
공복(空腹)의 아침부터 길을 잃고 또 잃고
큰물이 할퀴고 간 흐린 호수를
눈길로 어루만지다가 더듬다가 핥다가
왜가리, 저 또한 길을 잃고 쓰러진
갈대 숲 속 저 혼자 왁왁대는
왜가리 그 녀석 앞에서 나도 쓰러져
어푸러지면서 왁왁대면서 그만
속절없이 그저 울고만 싶드라
송태한, 황태
숲이 쥐 죽은 듯 동면에 들 때
나는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다
가진 것 없는 알몸에
눈 속에 엎드려 숨을 고르고
덕장 사이로 얼었다 녹은 살점
깃발인 양 나부낀다
추억은 혹한에 뼛속까지 얼어붙고
못다 한 사랑도 살결이 터서
나무지게 발채 같은 허공에
꽃잎처럼 허물 띄우면
가시가 드러나는 신열(身熱)의 고통
이름도 넋도 높바람에 말라
시래기처럼 바싹 야윈 한 오라기 꿈에
남은 건 반짝이는 금빛 속살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