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강은교, 진눈깨비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김상옥, 백모란(白牧丹)
이 한 조각 하얀 선지(宣紙) 온갖 형용(形容)을 앉히는 자리
바람에 나부낀 네 살갖은 아직 오지 않아도
질탕히 신들린 마음을 타고 떨기채로 와 있다
물감을 풀다 말고 저 투명을 받아낸 손놀림
이제는 우로(雨露)도 기름진 뜨락도 다 그만두고
인위(人爲)와 무위(無爲)로만 다리 놓아 서로 건너다닌다
박두진, 산에 살어
먼 첩첩 열굽이 꽃골짜기 돌아든 곳
내가 온 곳을 따라 너도 오라
숙아
머리에는 고운 산꽃을 따 달어 이브처럼 꾸미고
한아름 붉은 꽃을 가슴에 안고
새처럼 사뿐히 달려오듯 내게 오라
숙아
화장도 생활도 풍속도 버리고
여기 먼 아무도 없는 골에
천년을 산에 살러
내게 오라
숙아
민영, 이승과 저승
언제부턴가
수정으로 빛나는 별빛 한 점을
내 저승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네
불꽃으로 파열하는 석류처럼
그 별이 떨어질 때, 비로소 나는
오랜 나그넷길에 지친 몸을
호롱불 아른거리는 주막집 마루방에
누이리라 생각했네
그 언제부턴가
바닷가 가파른 벼랑 위에 핀
진보라빛 도라지꽃 한 송이를
되살아난 내 이승의 모습이라 생각했네
머리카락 날리는 바닷바람은
꽃대궁을 흔드는 새벽 찬 바람
서녘으로 떠나가는 구름발처럼
해연(海燕)의 울음 따라 떠나가려네
김남조, 우편물
내가 못 가는 곳에도
나의 책은 우표 붙이고 간다
책갈피 첫머리
저편 이의 이름을 쓰곤
시린 손을 잠시 댄다
가서 안부 전하고
호젓이 그 옆에 오래 머물라고
그가 외로울 땐
그 더욱 옆에 꼭 있으라고
마음 깊은 당부도
안 보이게 함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