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이수명, 그 집에는
그 집에는
눈처럼
떨어지고 있는
계단들이 있다
눈처럼
수평으로 이동하는
눈처럼 백발이 되어버린
계단들이 있다
검은 사이렌처럼
허공을 내 발들로 채우고
그 집에는
눈처럼
녹고 있는
계단들이 있다
이제니, 단 하나의 이름
얼어붙은 종이 위에서 나는 기다린다
얼음의 결정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물처럼
발설하지 않은 이름을 대신할 풍경이 몰려올 때까지
월요일에 나는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
아니 화요일 아니 수요일 아니 목요일 아니 금요일
이미 잃었는데도 다시 잃고야 마는 요일의 순서들처럼
수면양말에 담긴 너의 두 발은 틀린 낱말만 골라 디뎠지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무 환하고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흰색을 이 검은색을 고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고아에게
오늘의 심장은 어제의 심장이 아니란다
건초더미라는 말은 녹색의 풀이 한 계절을 지나왔다는 말
세계의 끝으로 밀려난 먼지들의 춤도 이와 마찬가지
소리가 되기 위해 모음이 필요한 자음들처럼 이제 그만 울어도 좋단다
말없는 자매들처럼 돌아누워 나누는 애도의 목례
검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는 이름 하나를 흘려 쓴다
아득히 맴도는 이름 : 너를 부를 때마다 고통을 느낀다
흑연의 어조로 천천히 닳아가는 이름 : 우리는 함께 혼자였다
입 속에서만 부풀려온 단 하나의 이름 :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을 아껴야만 했다
언제나 나는 도착하고 싶었다
도착한 순간조차도 도착하고 싶었다
이대로 얼마나 오래 태양을 바라볼 수 있을까
고개를 돌리면 작고 둥근 흑점으로 번져가는 얼굴
나란히 누워 눈멀던 날들의 빛은 어디로 사라졌나
세계의 끝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녹고 스미는 것들이 두 눈 가득 차오른다
나는 이상하게 푸르스름하게 살아 있다
김소월, 겨울
뼈만 남은 두 팔을 높이 내들고
나무는 부들부들 떨면서 우네
헐벗은 신세만도 억울타 하련
바람조차 이다지 악착하다고
나무의 설은 정상 어루만지며
포근포근 흰자리 깔아 놓으며
눈은 오네 내리네 고이 쌓이네
하늘은 자장자장 잠들라 하네
눈 이불에 덮여서 나무는 자네
명일의 새 희망을 가슴에 안고
악착스런 겨울을 맘으로 울며
세상은 고요하고 바람만 부네
채찍 끝에 생명이 죽을 것이랴
새봄일 제 파랗게 싹트는 것을
송재학, 죽은 사람도 늙어간다
울 어머니 매년 사진관에 다녀오신다
그곳에서 아버지 늙어가시니
어머니 미간의 지층을 뜯어내면
지척지간 아버지 주름이다
굵은 연필이라면 머리카락 몇 올 아버지 살쩍에 옮겨
늙은 목탄 풍으로 바꾸는 게 어렵지 않다지
그때마다 깃 넓은 신사복은 찡그리면서
아버지, 어머니 그림자처럼 늙으신다
하, 두 분은 인중 닮은 이복남매 같기도 하고
오누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고민은 할미의 얼굴로
어떻게 젊은 남편을 만나느냐는 것이지만
하, 이별의 눈과 입도 한 사십 년쯤 되면
다정다감하거나
닳아버리고
걱정하면서도
설렌다
라고 되묻는 식솔들이 생기나 보다
집이 생긴 별의 식솔들도 따라오나 보다
김영재, 벼는 죽어서도
벼는 죽어서도 논으로 간다
짧은 가을볕과
이별하고
여름내 농약지고 피사리하던
갈퀴손 농부에 이끌려
바람벽에 시린 등 기대고 사는
집으로 가지만
겨울 지나고 봄이 오면
다시 논으로 간다
벗겨진 속살
농부의 허기진 가슴 달래면
농부는 가슴 속에 벼를 키우며
찬바람 논둑에 서성이는
기다림으로 누워 있는
논으로 간다
벼는 살아서도 논에서 살고
죽어서도 끝내는
논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