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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돌
누이야, 혼자서 오래 앉아
빈 마음, 빈 생각의 즐거움을 아는가
해는 종일토록 원두막 위에 누워
갓 자른 풀잎의 신랑이 되고
한 여름 논가에 소나기 치듯
발랄히 내보이는
돌의 손짓이여
누이야, 이 밤에는
혼자 있는 즐거움을 아는가
밖으로는 비와 바람을 모는 어두움
천둥의 고함에
젖은 여름은 찢어지고
땅 밑으로 땅 밑으로 숨어 흘러서
돌은 숨이 차다
그 아침 자리에 새로 씻긴 것
의젓한 돌이여, 돌의 몸짓이여
지나간 냇물가에
고이 낳은 풀잎
누이야, 하루 사는 즐거움을 아는가
김종문, 의자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욱이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交椅)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도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팔 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 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軸), 나의 만세 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 중이더라도 비어 있지 않다
이하석, 붉은 벽보
벽 끝으로 돌아간 길은
아직 불들이 꺼지지 않았는데도 어둡다
신새벽 숙취의 햇빛이 벽을 비추고
닫힌 창들마다 어둔 하늘이 안의 어둠과 함께 비친다
부나비와 하루살이들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갑자기 통째 드러나버린
가출한 아내를 찾는 한 사내가
곁을 따르는 소년의 검은 옷을 여미고 지나가며
고개 수그린다
벽에 그들의 그림자가 붉게 걸린다
이문재, 태양계
비행기가 착륙할 때 보았다
8천 미터 상공에서 잃어버렸던
자기 그림자를 활주로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히말라야를 넘거나
태평양을 종단하는
철새들도 마찬가지다
땅이 가까워지면
서둘러 제 그림자부터 찾는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만 하거나
앞으로 미래로만 달려나가면
제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
자기 그림자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나의 그림자
밤은 낮의 그림자
내일은 어제의 그림자
빼앗긴 그림자를 되찾아야
너와 나 지금 여기가
길고 넓고 높고 깊어진다
그림자는 땅에 있다
모든 그림자는 지구에 있다
민재식, 자화상(自畵像)
이렇게 호올로
언덕을 넘어가는 시간은
자화상을 그리는 시간
둘이서 가더라도
얘기할 화제가 없는
셋이서 가더라도
애기할 화제가 없는
무데기로 간다손
얘기할 아무 것도 없는
이렇게 다만 호올로
언덕을 넘어가는 시간은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
사월을 아트리에로 삼는
내 캔버스는
회색에 젖고
나이가 가르친
내 자화상은
윤곽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