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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봉지밥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힘도 되는 밥이었지요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 있지요
사랑이지요
담을 데가 없어 봉지에 담지요
담아도 종일 불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지요
눌리면 터지고
비우지 않으면 시금시금 변해버리는
이래저래 안쓰러운 형편이지요
밥풀을 떼어먹느라 뒤집은 봉지
그 안쪽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은
사랑을 다 발라낸 뼈처럼
도무지 알 길 없다는 표정이지요
더 비우거나 채워야 할 부피를
폭설이 닥치더라도 고프게 받으라는 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봉지는 담고 있는지요
바람이 봉지를 채 간다고
사랑 하나 치웠다 할 수 있는지요
밥을 채운 듯 부풀어
봉지를 들고 가는
저 바람은 누군지요
이희승, 남창(南窓)
햇살이 쏟아져서
창에 서려 스며드니
동공이 부시도록
머릿속이 쇄락해라
이렇듯 명창청복(明窓淸福)을
분에 겹게 누림은
이성부, 철거민의 꿈
부르도자는 쉴새없이
내 가난마저 죽이면서
내 이웃들의 깨알 같은 꿈마저 죽이면서
눈들을 모으고 귀를 모았다
화려한 소식이 곳곳에 파고들어
이마를 쳐들었다. 세상에 대하여
나무라고 후회하고
나는 또 무릎꿇고 빌고 울었지만
부르도자와 바람은 막무가내
껄껄대는 큰 두 다리
황량한 배반, 무책임이며 자랑이며 싸움이었다
아프다는 소리도 죽음은 내지 못했다
이 시끄러운 꿈들의 피, 잠이 들면 그대로
시간은, 시간을 낳고 있었다
어둠이 깨우치는 것도 어둠
불행은 끝끝내
나의 마지막 의지까지 내리눌렀다
김소월, 찬 저녁
퍼르스렷한 달은, 성황당의
데군데군 헐어진 담 모도리에
우둑히 걸리웠고, 바위 위의
까마귀 한 쌍, 바람에 나래를 펴라
엉긔한 무덤들은 들먹거리며
눈 녹아 황토(黃土) 드러난 멧기슭의
여기라, 거리 불빛도 떨어져 나와
집 짓고 들었노라, 오오 가슴이여
세상은 무덤보다도 다시 멀고
눈물은 물보다 더 더움이 없어라
오오 가슴이여, 모닥불 피어오르는
내 한세상, 마당가의 가을도 갔어라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는
소리를 들어라, 눈석이물이 씨거리는
땅 위에 누워서, 밤마다 누워
담 모도리에 걸린 달을 내가 또 봄으로
김해강, 초적(草笛)을 불며
마음 놓고 발을 떼어 놓을
한 덩이 흙도 갖지 않았노라
마음 놓고 몸을 담아 볼
한 칸 구름도 지니지 않았노라
그러나 마음엔 하늘 한 자락
고요히 깔린 푸른 잔디밭이 있노라
초롱초롱 어린 별들이 달아 놓은
아름다운 노래가 켜 있노라
가난한 내 세월이 슬프기도 했건만
푸른 잔디밭엔 언제나 아침이 찾아왔고
허술한 내 모습이 외롭기도 했건만
구김 없는 노래는 기(旗)폭보다도 선명했더니라
넋이 자갈밭에 구울러 깨어져도 좋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발길에 채어
풀잎과 함께 썩어 버려도 아까울 것 없다
내 오직 하늘 한 자락
어깨에 걸치고 살아가리
내 오직 어린 별들이 켜 주는
아름다운 밤을 지키며 살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