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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유리창
여보
내 마음은 유린가 봐, 겨울 한울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 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간 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아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 마음은 유린가 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박의상, 성년(成年)
나는 겨울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듣는 내 말이
사기그릇보다 차고
또 멀다
성냥갑 속의 흥분도 가득한 꿈도
벌레처럼 온순함도
네겐 벌써 없다
너는 그것을 울면서
나에게 알려 주었고
너는 스물이 넘은 것이다
알고 있느냐, 너는 겨울을 알아야 한다
귀를 막는 것에서부터
눈을 감아야 하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
이 겨울은 너를 재우기 위해서도
너를 더 가둬두기 위해서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겨울을 느낀다
네가 울면서 달려온 어둠 속의
뜨거운 입김이
목소리보다 먼저 와 닿는다
이 먼 나의 이마에
서정윤,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구름은 어떤 슬픈 꿈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우울한 얼굴로
나의 아픔을 새롭게 하는가
새들의 울음이 목 메이는 저녁
지나가는 모두가
아무 의미 없이 그리울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꾸 나를 부른다
온 몸을 떨며 손을 흔드는 들꽃
그 옆에 나비가 그려지고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살아 있어야 한다, 사랑으로
아직도 따스한 눈으로
들꽃을 본다
아무 것도 아닌 채
사라질 수 있는 그들이 부럽고
나 또한 그런 목숨으로
내 삶의 마지막 책장을 덮어야지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
살아있어야 한다, 들꽃처럼
김기택, 웃음이 걸어오고 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네가 걸어오고 있다
웃음을 가득 담은
작은 눈 작은 입 작은 얼굴이 오고 있다
작은 얼굴에 꼭 맞는
이 없는 웃음이 오고 있다
삶이 다 들어가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얼굴
작은 팔 작은 다리가 오고 있다
그 팔 다리에 꼭 맞는 신발이 오고 있다
지금 내게 오고 있는 웃음은
얼마 전까지 다른 웃음이 웃었던 웃음
있는 힘을 다해 눈물을 삼키던 얼굴이 웃었던 웃음
아기 얼굴 속에서 겨우 웃음만 남은 네가
옛 친구를 알아보았다는 듯이
죽은 후 처음이라 너무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한때 이 세상에서 얼굴을 가졌던 이들의 모든 웃음을
작은 얼굴에 다 담아 왔으며
아장아장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
네 죽음 따라 함께 화장되었던 웃음이
환한 아기 얼굴을 새 옷처럼 입고
뒤뚱뒤뚱 나에게 걸어오고 있다
이희승, 낙엽
시간에 매달려
사색에 지친 몸이
정적을 타고 내려
대지에 앉아 보니
공간을 바꾼 탓인가
방랑길이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