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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물에게 길을 묻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물속에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물속에서 물만 먹고 살았지요
물먹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물보라는 길게 물을 뿜어 올리고
물결은 출렁대며 소용돌이 쳤지요
누가 돌을 던지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물소리 바뀌고 물살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웅덩이 속 송사리떼를 생각했지요
연어떼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물가의 잡초들을 힐끗 보았지요
눈비에 젖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건 물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물먹고 산다는 것은 물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물먹고 살수록 삶은 더 파도쳤지요
오늘도 나는 물속에서 자맥질하지요
물같이 흐르고 싶어, 흘러가고 싶어
강희근, 안개
안개가
아파트 지붕을 딛고 내려와
창문을 제 어머니 젖인 양 어루만지더니
땅바닥으로 흘러내리어, 마침내
세상을 과일봉지처럼 싸버렸다
나의 사색도
나의 연민도
무슨 흘러내리는 것으로 싸버릴 수 없을까
무슨, 과일봉지 같은 것으로
나희덕, 새는 날아가고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밖은 고요해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사과 씨는 사과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을 벌리는 빈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삼키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이성부, 집
높은 집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서
내 좁은 방을 자꾸 엿보는 것 같다
남창 밖에 서 있는 감나무가 그런대로
가려주므로 나의 부끄러움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다
오른쪽 창으로 가끔 밖을 내다보고
창문을 열어 바람이 다녀가도록 한다
개구쟁이들 노는 소리 까르르 내 어린 날을 당겨
나를 문밖으로 나가도록 만들고
멍게 해삼장수 자동차에서 들리는 되풀이 소리
나도 군침 돌아 기웃거리게 한다
아파트들이 하나씩 등 뒤로 솟고
저 아래쪽으로도 공사가 한창이다
하늘 좁아지고 햇볕도 많이 줄었다
가까운 산들이 아파트에 포위되어 꼼짝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모두 산이다
내 집도 높은 창들이 많이 내려다봄으로
이웃들 어려움 나누어 갖지 못한 나의 서울 살이
속속들이 보여질 날 오겠지만
나는 흔들거리는 나를 내버려두기로 한다
문태준, 노모(老母)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