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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김소월, 옛님을 따라가다 꿈 깨어 탄식함이라
붉은 해 서산 위에 걸리우고
뿔 못 영근 사슴의 무리는 슬피 울 때
둘러보면 떨어져 앉은 산과 거치른 들이
차례 없이 어우러진 외따로운 길을
나는 홀로 아득이며 걸었노라
불서럽게도 모신 그 여자의 사당에
늘 한 자루 촛불이 타붙음으로
우둑히 서서 내가 볼 때
몰아가는 말은 워낭 소리 댕그랑거리며
당주홍칠(唐朱紅漆)에 남견(藍絹)의 휘장을 달고
얼른얼른 지나던 가마 한 채
지금이라도 이름 불러 찾을 수 있었으면
어느 때나 심중에 남아 잇는 한마디 말을
사람은 마저 하지 못하는 것을
오오 내 집의 헐어진 문루(門樓) 위에
자리잡고 앉았는 그 여자의
화상(畵像)은 나의 가슴속에서 물조차 날건마는
오히려 나는 울고 있노라
생각은 꿈뿐을 지어주나니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가면
나도 바람결에 부쳐버리고 말았으면
조동범, 정육점
죽음을 널어 식욕을 만드는 홍등의 냉장고
냉장고는 차고 부드러운
선홍빛 죽음으로 가득하다
어둡고 좁은 우리에 갇혀 비육될 때까지
짐작이나 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 식욕을 떠올렸을
단 한 번도 초원을 담아보지 못한 가축의 눈망울은
눈석임물처럼 고요한 죽음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죽어서도 편히 눕지 못한
냉장고의 죽음 몇 조각, 무심하게
해넘이의 하늘 저편을 바라본다
죽음을 담고
물끄러미 저녁을 맞고 있는 정육점
홍등을 두른 선홍빛 죽음이 화사하게 빛나는
정육점, 생생한 죽음 앞에서 식욕을 떠오르게 하는
칼날 같은
죽음과 식욕의 경계
황근식, 수숫대의 꿈
흐린 정신으로 커피를 끓이면서
응어리로 뭉친 자갈을 깨며 마친
하루의 일과를 생각한다
눈 덮인 벌판
빈 수숫대로 목을 일으킨 꿈
꺽이지 말라
꺽이지 말라
긴 겨울 벌판의 바람으로 울던
젊음도 어리석어
앙상하구나. 너무 춥구나
황학주, 노랑꼬리 연
노랑꼬리 달린 연을 안고
기차로 퇴근을 한다 그것은 흘러내린 별이었던 것 같다
때론 발등 근처에 한참을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손을 내밀 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니까
길에 떨어진 거친 숨소리가 깜박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거다
아물면서도 가고 덧나면서도 가는 밤에 우리는 부끄러웠을라나
그런 밤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할지
네게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도착하고 있거나 잠시 후에 발차하는
기차에 같이 있고 싶었다
내 퇴근은 날마다 멀고 살이 아파
노랑꼬리 연이 필요했던 것이고
어디에 있든 너를 지나칠 수 없는 기차로 갔던 것 같다
너의 말 한마디에 하늘을 날 수 있는 댓살이 내 가슴에도 생겼다
꼬리를 자르면서라도 사랑은 네게 가야 했으니까
그것은 막막한 입맞춤 위를 기어오르는 별이었던 것 같다
내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그런 운명은
오래오래 기억하다 해발 가장 높은 추전역 같은 데 내려주어야 한다
바람이 분다
지금은 사랑하기에 안 좋은 시절
바람 속으로 또다시 바람이 분다
지금은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
네게로 가는 별, 댓살 하나에 온몸 의지한
노랑꼬리 연 하나 바람 위로 떠오른다
황인숙, 사랑의 황무지
아침 신문에서
느닷없이 마주친
얼굴, 영원히 젊은 그 얼굴을 보며
끄덕끄덕끄덕끄덕끄덕끄덕끄덕
칼로 베인 듯 쓰라린 마음
오래전 죽은 친구를 본 순간
기껏
졌다, 내가 졌다, 졌다, 는 생각
벼락처럼
그에겐 주어지지 않고 내게는 주어진 시간
졌다, 이토록 내가 비루해졌다
졌다, 시간에
나는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