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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꾸중
엄마를 따라 산길을 가다가
무심코 솔잎을 한 움큼 뽑아 길에 뿌렸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호승아 하고 나를 부르더니
내 머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니는 누가 니 머리카락을 갑자기 뽑으면 안 아프겠나
말은 못 하지만 이 소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노
앞으로는 이런 나무들도 니 몸 아끼듯 해라
예, 알았심더
나는 난생처음 엄마한테 꾸중을 듣고
눈물이 글썽했다
신경림, 비에 대하여
땅에 스몄다가 뿌리를 타고 올라가 너는
나무에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때로는 땅갗을 뚫고 솟거나 산기슭을 굽돌아
샘이나 개울이 되어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들고
먼 데 사람까지를 불러 저자를 이루기도 하지만
그러다가도 심술이 나면 무리지어 몰려다니며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으로 물고 할퀴어
나무들 줄줄 피 흘리고 상처 나게 만들고 더러는
아예 뿌리째 뽑아 들판에 메다꽂는다
마을과 저자를 성난 발길질로 허물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을 거친 언덕에 내팽개친다
하룻밤 새 마음이 가라앉아 다시 나무들 열매 맺고
사람들 새로 마을을 만들게 하는 너를 보고
사람들은 하지만 네가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다
너를 좇아 만들고 허물고 다시 만들면서
너보다도 더 사나운 발길질과 주먹질로 할퀴고 간
역사까지도 끝내는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한다
김명수, 월식(月蝕)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 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 주던 저녁
박주일, 미간(眉間)
피리 속으로
작별의 산그늘이 길게 내린다
그늘은
피리의 울음으로
저 구름에 스며들어
서릿발 새벽을 나는
기러기나 되어 돌아올 것인가
나의 피리
백의 숨구멍에선 백의 울음이
천의 시름 속 천의 피리가
옥빛으로 풀려나와
산을 에이는 바람이 되어 돌아올 것인가
피리 속으로
나의 손길이 영 닿지 못할
피리의 슬픔 속으로
사월의 하루가 잠기어 갔느니
어디선가 한 줄기 향(香)이라도 일어서
향이 받드는 꽃으로 피어
우러러 당신을 대하기나 할 것인가
어이할꺼나 어이할꺼나
내 아직 어려 익히지 못한
말씀 속 뜨거운 말씀이
밤 사이
제비꽃에라도 내려와
제비꽃 꿈속에라도 내려와서는
달래는
풀벌레 울음이라도
나의 어두운 미간(眉間)에
빛이라도 심으시고 가실까
박목월, 바람 소리
늦게 돌아오는 아이를 근심하는 밤의 바람 소리
댓잎 같은 어버이의 정(情)이 흐느낀다
자식이 원술까
그럴 리야
못난 것이 못난 것이
늙을수록 잔정(情)만 붙어서
못난 것이 못난 것이
어버이 구실을 하느라고
귀를 막고 돌아누울 수 없는 밤에
바람 소리를 듣는다
적막(寂寞)한 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