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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하, 걷는 나무
온 몸에 눈이 달린 나무는 즐겁다
하늘에서 땅속까지 얼마든지 다 보며
호동그란 초록눈 쌍꺼풀로 열어 놓고
천 리 만 리 속속들이 별나라까지
홀로 서서 온몸으로 이 세상 다 보는
나무는 눈이 많아 거짓말도 안 한다
이제야 알겠다. 만 리를 앉아 보는
노자(老子)께서도 한 그루 푸른 나무였음을
눈감고 수만 리 헛걸음 거두셨던
노자의 마음은 눈투성이 나무였다
천 개의 눈으로 천 리를 보고
만 개의 눈으로 만 가지를 헤아리는
나무는 세상 가득 팔 다리 펼치어
아래로만 걷고 하늘로만 자란다
조창환, 빈 집을 지키며
내 쓰린 늙음이 먼저 와서
빈 집의 저녁 연기 속에 앉아 있다
계단을 올라오는 낯선 사람이
아내가 잠그고 간 빗장을 푼다
홀로 마시는 술에 취하지 않는다
책상 위에 한움큼 못이 흩어져
이 집은 수십년 전과 다르지 않다
죽음이 오기 전에 반드시 이명증(耳鳴症)이 있을 것이다
최승범, 한란(寒蘭)
옥빛 꽃봉으로
해맑게 부풀더니
한 송이 또 한 송이
눈결에 도 한 송이
벙긋이
벙근 아침은
천하 온통
내 것일레
마음 들뜨지 말라
차분하라 잔잔하라
눈맞춤 눈을 돌려
책장을 펼쳐 들자
방 가득
옥빛 향기 일어
마음 다시
들썩이네
나태주, 기쁨
난초 화분의 휘어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대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난초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는다
그들 사이에 사람인 내가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른다
이문재, 검은 돛배
나의 무덤은 커야 한다
종소리는 적벽에 부딪혀 금이 간다
마른 어깨에 실려 있는 마른 저녁
길에서 죽지 못한 도보고행승은 아름답다
먼지 나는 길에 떠 있는 돛배
아지랑이라도 지나가는가
오늘도 사랑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간다
나는 무덤이라도 큰 것으로 가져야지
봄 언덕 종다리와 보리의 뿌리들이
흙을 곱게 만들고
저렇게 금 간 종소리는 어디로 가 쌓이는지
언제쯤 부서진 것이지
적벽은 붉구나
나는 무덤이라도 커야 한다
무덤 하나라도 검은 나를 힘껏 껴안아 주어야 한다
마른 봄 아침 길
아 이슬 맞은 어린 진달래라도 미친 듯 씹으며
길 위에서 죽지 않을
도보고행승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녁 적벽으로 걸어가는 종소리는
붉구나 너무나 붉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