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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영, 또 다른 세상
말간 귀를 세운
은사시나무가
비발디를 듣고 있다
야윈 바람은
가볍게 가볍게
발을 헛딛고
방금 숲에서 달려나온
찌르레기 울음소리가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다
얼마를 버리고 나면
저리도 환해지는 것일까
오늘도, 나뭇잎에는
나뭇잎 크기의
햇살이 얹혀 있고
눈물에는 눈물 크기만 한
바다가 잠겨 있다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같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이시영, 나무에게
어느 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 하는구나
내가 네 발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정호승, 가시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도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성미정, 매우 시적인 배열
어느 날 문득 책꽂이에 꽂힌 시집을 보니
붉은 방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좀팽이처럼
물길 아니라 내 무덤 푸르고
모자 속의 시들 잠언집 고슴도치의 마을
세속도시의 즐거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매우 시적인 배열
길다랗고 섬세한 펜 같은 손을 가진
그를 칭찬했더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삿짐 센터의 직원이 임의대로
꽂았을 뿐이라고
밝은 방에서
이 경우 누가 시인인가
무의식적으로 꽂았을 뿐인데도
매우 시적인 배열을 보여준
이삿짐 센터의 직원인가
매우 시적인 배열을 눈치 챈 이가 시인인가
이삿짐 센터의 직원의 존재를
알려준 그가 시인인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이 매우 시적인 배열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