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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의 그늘 79년부마항쟁
게시물ID : history_90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ss989
추천 : 4
조회수 : 69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12 04:04:38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38> 부마항쟁

 

 

4년간 단 한번의 데모 없이
“유신대학” 자조했던 부산대
부끄러움에 모인 대학생 200명이
5만명의 시민으로 늘어났다
비상계엄으로 대대적 진압하자
이번엔 마산이 움직였다

때밀이, 공원, 구두닦이 등
‘20대 전후 불량성향자’들이
대학생으로 가장해 참여했고
서민 자영업자까지 가세했다
배후를 찾으려 한 정권은
남민전과 항쟁을 엮으려 했다

 

1979년 10월18일 아침, 조간신문을 집어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부산에 18일자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YH사건이 터진 뒤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이 떨어지고, 2주 일 전인 10월4일에는 급기야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는 소동까지 일어나는 등 정국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지만, 비상계엄은 참으로 느닷없었다. 7년 전 10월17일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유신체제는 꼭 7년 후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종막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이틀 전인 10월16일 부산대학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비상계엄을 불러온 이 시위가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엄청난 태풍을 불러올 나비의 날갯짓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바로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이었다.

 

 

 

 

이대생이 남자 성기 그림과 가위를 보냈다?

부산대학의 상징은 무지개문에 달린 자유의 종과 독수리탑 꼭대기의 독수리였다. 부산대생들은 부산대학의 2대 불가사의가 울리지 않는 자유의 종과 날지 않는 독수리라고 자조했다. 1975년 11월 재일동포 유학생 김오자를 중심으로 조작된 학원 간첩단 사건으로 부산대학의 학생운동이 초토화된 이후, 학내에는 4년 동안 유인물 한 장 뿌려지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의 대학 캠퍼스에는 ‘짭새’들이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로마군사 복장을 한 전경들을 태우고 온 닭장차는 학교 도로에 길게 줄 지어 서 있었다. 매일매일 숨죽인 채 닭장차와 짭새들 사이로 눈을 깔고 얌전히 등교해야 했던 젊은 학생들의 모멸감과 자괴심은 날로 깊어가고 있었다. 4년간 데모 한번 없어 스스로 ‘유신대학’이라고 자조하던 부산대학에서는 “이화여대생들이 남자 성기 그림과 가위를 보내왔다”는 유언비어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다. 이대생들이 실제로 가위와 그림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데모도 못하는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은 스스로 이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며 자신들을 질책했다.

 

 

 

 

 

 

1979년 10월15일 오전 10시가 조금 못 되어 부산대 교정에는 10시 도서관 앞으로 모이자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유인물을 뿌린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초조하게 사람들이 모이길 기다렸으나 학생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다. 10시30분쯤 일이 실패한 것으로 단정한 주동자들이 학교를 빠져나온 뒤에야 도서관 앞 잔디밭과 계단에는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30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무언가 극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모였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 구호 한번 외쳐본 적도, 어깨 겯고 스크럼 한번 짜본 적 없는 학생들이었다. 모두들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누군가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폭풍전야의 적막을 깨는 첫발을 내딛지는 못했다. 숨막힐 듯한 시간을 보내고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다. 눈물이 나게 부끄러웠다.

 

 

 

 

 

다음날인 10월16일 또 다른 학생들이 유인물을 뿌렸다. 전날의 실패에 대한 반성 때문에 경제학과 정광민은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강의실을 돌며 두 주먹을 치켜들고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처음 200여명에 불과했던 시위대는 곧 2000명으로 늘어났고, 시내 진출을 기도하면서 정문으로 향할 때는 그날 등교한 학생의 절반이 넘는 5000명으로 불어 있었다. 경찰의 완강한 봉쇄에 막혀 주춤하던 학생들은 구 정문 옆의 담장을 힘껏 밀었다.

 

 

 

 

 

때로 부실공사도 민주화에 기여하는가, 힘없이 무너진 담장 밖으로 학생들은 몰려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타자 안내양은 차비를 받지 않았고 운전사는 격려했고 승객들은 손을 잡아주었다.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자 부산대학교 당국은 학교차로 시위현장으로 가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교수들을 모았다. 이때 마침 고향 부산에 와 있던 문교장관 박찬현이 허겁지겁 부산대로 달려와 교수들에게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교수 여러분들의 책임이다. 어용이 무엇이 두려운가. 자랑스러운 어용이 되라”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연설 도중 비서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쪽지를 전하자 당황한 박찬현은 연설을 중단하고 황급히 달려 나갔다. 창선동 파출소가 학생들에 의해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휴대폰은 없던 시절이지만 소식은 빨랐다. 부산대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아대와 고려신학대 학생들도 시내로 모여들었다. 경찰이 진압하면 학생들은 복잡한 골목길로 피했다가 다시 모이곤 했다. 시민들은 1960년 4·19 이후 근 20년 만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낮의 시위는 학생들의 시위였지만, 밤이 되자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규모도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5만을 넘어섰고, 양상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격렬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위는 다음날인 17일도 계속되었다. 16일 밤에는 파출소 11곳과 언론기관 1곳, 17일 밤에는 경남도청, 중부세무소, 경찰서 2곳, 파출소 10곳, 언론기관 3곳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부산시민들은 유신 7주년을 이렇게 격하게 기념해주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잔인한 진압

시위대의 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시민들이 유신권력의 최말단 촉수로 여긴 파출소였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령하면 오토바이나 순찰차를 때려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어 짓밟고 불질렀다. 시위대의 또 다른 공격 대상은 언론인과 언론사였다. 특히 17일자 신문에 부산시내를 들었다 놓은 16일의 격렬한 시위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10월 유신 7주년이라는 사실만 강조하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당시 한 기자는 “기자 신분임을 밝혀도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진압대는 진압대대로 기자를 마구 폭행”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케이비에스(KBS) 부산방송국과 5·16 장학회로 넘어가 어용언론이 된 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는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유신체제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방송은 무사했다.

]

 

 

 

 

당시 부마항쟁을 밀착 취재했던 조갑제는 시위대가 “표적으로 삼은 언론기관은 그 나름대로 정확하게 선별된 것이란 평가를 기자 사회에서 받았다”며 “민중의 분노는 폭발적이라고 해서 결코 눈먼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군중들은 “야음의 익명성 속에서 억압된 자아의 해방감을 유감없이 분출”했다. 파출소를 습격했던 한 어린 노동자는 “속이 후련했습니다. 나이도 몇 살 안 되었겠지만 겁도 없었고 정말 인자 세상이, 아, 바뀌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또 다른 참여자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며 “오히려 황홀하기까지 한 그런 분위기”를 느꼈으며 “희열을 넘어서 황홀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 조갑제에 따르면 “많은 취재기자들은 그때의 분위기를 ‘축제’로 표현”했다고 한다.

5년 동안 데모가 없다 보니 경험이 부족하긴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10월16일 부산진경찰서 기동대가 시내로 나온 학생들과 처음 대치한 곳은 동래온천 부근 미남로타리였는데,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면서 방패를 갖고 나오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학생들이 인근 공사장의 자갈을 던지자 경찰의 방어선은 궤멸되었다. 10월17일 오전 내무장관 구자춘은 시위진압 실패의 책임을 물어 부산시경 국장 이수영을 해임하고 시위진압 전문가인 육사 8기 동기 송제근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경찰이 시위를 진압할 책임을 맡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박정희는 18일 밤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부산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해병대는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계엄군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중상을 입는 사람이 속출했다.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위대는 깨어지고 무수한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시내는 다시 ‘강요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시위가 격렬하긴 했지만 내무장관 구자춘은 경찰 병력으로 시위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지를 관할하는 2관구사령관 장성만 소장도 구태여 군 동원을 하지 않아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비상계엄 선포라는 과잉대응을 했다. 어떤 도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박정희는 날이 갈수록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으로 부산의 시위는 일단 잠잠해졌다. 이번에는 마산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마산은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가 발생한 고장이지만, 박정희의 오랜 충복이자 경남대의 사실상 교주였던 박종규의 고향이기도 하다. 경남대 학생들은 처음 시위에 나설 때 3·15 의거 희생자들에게 “선배님 못난 후배를 꾸짖어 주십시오. 우린 전국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 시위를 벌일 때 학교당국의 농간으로 ‘유신찬성 데모’를 해버린 못난 후배들입니다”라고 묵념을 올렸다. 마산의 시위는 부산보다 더 격렬했다. 시위대는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사를 공격했던 것처럼 공화당사를 때려 부수었고, “박종규 개새끼, 죽여라!” 하고 외치면서 그의 호화주택으로 몰려가 돌팔매를 퍼부었다.

 

 

 

 

시위대는 부산과 마찬가지로 시내 곳곳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박정희의 사진을 떼어내 찢어버리고 짓밟았다. 부마항쟁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소문은 오랫동안 떠돌았는데 2011년에 가서야 사실로 확인되었다. 경찰의 보고서에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던 이의 신원이 유족이 제시한 호적등본의 사망사유 등을 통해 유치준(당시 51세)씨로 확인된 것이다. 마산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자 유신정권은 10월20일 정오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로 부산에서는 모두 1058명이 연행되어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마산에서는 505명이 연행되어 59명이 군사재판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10월18일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지각없는 일부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불순분자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했고, 치안본부는 시위양상을 볼 때 “우발적인 군중 시위행동이 아닌 조직적인 폭거”로 “조직적인 불순세력이 개입한 징후가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길 가다가 애국가 나오면 멈춰서고, 반공궐기대회에 동원하면 김일성 허수아비 화형식을 잘만 하던 선량한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폭도’로 돌변하여 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불태운 것에 대해 유신정권은 어떻게든 나름의 설명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배후가 필요했다

 

 

 

 

. 당시 부산 보안부대장으로 계엄하의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권○○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정보부 모 국장이 찾아와 “남민전 조직도를 나에게 가져와 남민전 관련자가 부마사태를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맞춰서 수사를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 연행된 많은 사람들이 10월 초에 적발된 남민전과 부마항쟁을 억지로 엮으려는 유신정권의 기도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부마항쟁과 관련된 또 하나의 해프닝은 마산경찰서장 최창림이 시위대가 사제총기를 사용한 것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취재기자들에 따르면 이 사제총기라는 것은 딱총에 화약을 넣어 발사한 장난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1979년 부산·마산과 1980년 광주의 관계

1979년 10월에 하필이면 부산과 마산에서 격렬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나고, 1980년 5월에 하필이면 광주에서 격렬한 민중항쟁이 일어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그 지역이 배출한 정치인의 존재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물론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의 발발 이유를 김영삼 제명이나 김대중 체포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이때로부터 30년 가까이 지속된 이들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이 양김이라는 변수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좀더 엄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시위의 주체가 누구였나 하는 점이다. 박정희는 부산의 데모는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았냐면서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수리 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라며 시위의 배후는 신민당이고, 데모에 나선 것은 “식당보이나 똘마니들”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 이 ‘똘마니들’이 역사를 바꿨다. 부산시경의 <79부마사태의 분석>이란 보고서를 보면 “20세 전후 불량성향자 대학생 가장 합세(때밀이, 식당종업원, 공원, 구두닦이 등)”를 “데모의 특이양상”으로 지적했다. 특히 “야간이 되면서 시위대는 도시룸펜, 접객업소 노동자, 영세상인, 반실업상태 자유노동자,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상점종업원, 고교생 등 도시하층민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한 것이다. 광주항쟁에서도 일정하게 유사한 양상을 볼 수 있지만, 항쟁의 전체 흐름을 볼 때 학생이나 자영업자, 사무직 등 중산층의 역할 또한 경시할 수 없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급거 부산으로 내려와 현지를 둘러보고 생생한 보고를 받았다. 변호인이 작성한 ‘항소이유서’에 따르면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성격을 “피고인이 현장인 부산에까지 가서 본 결과 160여명을 구속하였는데 학생은 불과 16명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순수한 민간인이고, 남민전 같은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이 없고 오히려 민란이나 민중봉기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박정희에게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입니다. 불순세력은 배후에 없습니다. 위와 같은 민란은 정보자료로 판단건대 5대 도시로 확산됩니다”라고 보고했다가 박정희의 질책을 받았다.

유신정권은 1978년 12월 총선에서 패배한 주요한 이유를 경제문제의 악화에서 찾았다. 그런데 1979년도의 경기는 “1978년보다 현저히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물가는 뛰고 있었다.” 부마항쟁 직후 부산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부마항쟁이 발발한 첫번째 이유는 “경제 침체에 의한 서민 상인층의 불만”으로 나타났다. 부산은 박정희가 5·16 군사반란 전에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박정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사람들은 경제성장을 꼽지만, 당대의 민중들, 그것도 박정희가 특별한 연고를 가진 부산시민들은 정치적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경제의 실패 때문에 박정희의 사진을 불태웠고 유신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시민들의 저항이 확산되려 하자 박정희는 발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가 김재규의 총에 맞게 된다.

 

출처;한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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