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스포츠 스타들이 손꼽는‘나의 애장품’을 시리즈로 게재한다. 태극 마크를 달고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등에서 국위를 선양한 대표선수들의 영광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환희와 고통을 함께한 ‘물건’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 스타들의 애환이 담긴 애장품을 통해 다시 한번 그날의 영광을 추억하고, 공감대를 키워 공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는 취지다.
“몬주익 대첩 땐 용광로보다 더 뜨거웠다”
황영조의 신발
‘그 날’ 마라토너 황영조(43)의 두 발과 신발은 쇳물을 녹이는 용광로보다 더 뜨거웠다. 쇳물을 끓이기 위해선 섭씨 1,500에서 3,000도에 이르는 열이 필요하다. 지난 5일 만난 황영조는 “그때 내 신발의 온도를 측정했다면 1만도를 훌쩍 넘었을 것이다”라고 껄껄 웃었다. 1992년 8월9일(현지시간) 오후 8시43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마라톤 결승선. 72개국 112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황영조보다 앞서서 통과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2시간6분대 세계 최고기록을 보유했던 벨라이네 딘사모(에티오피아)를 포함한 랭킹 1,2,3위 모두가 황영조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꼭 56년 전 바로 그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고(故) 손기정 선생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피니시 라인을 향해 내달렸다. ‘황영조의 금빛 레이스는 손기정 선생의 비운을 씻어낸 한판의 멋들어진 씻김굿이었다.’ 황영조의 마라톤 금메달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그때의 감격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세월의 때가 흠뻑 묻은 낡은 한 켤레의 흰색 신발을 가리키며 자신의 ‘애장품 넘버 원’이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이즈 260cm로 황영조의 금메달을 제조했던 신발이었다. 그는 “기회가 되면 이 신발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기관에 기증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라톤 결승선 2km를 남겨두고 모리시타 고이치(일본)와 몬주익 언덕에서 사투를 벌일 때 황영조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던 ‘타이어’. 일본의 아식스사 제품으로 황영조는 “당시 마라토너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신발이었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이어 “심장이 마라토너의 엔진이라면 신발은 타이어에 해당한다. 실질적으로 경기력을 지배하는 것은 신발”이라고 강조했다. 황영조는 특히 “모리시타의 경우 아식스사에서 특수 제작된 맞춤신발을 신고 출전했다. 하지만 나는 시장에서 파는 기성품을 어렵사리 구해 신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품질에서 차이가 날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황영조가 2시간13분23초로 금메달을, 모리시타는 황영조보다 120m가량 뒤처진 채 22초 늦은 2시간13분45초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황영조는 “경기 도중 비오 듯 쏟아지는 땀 때문에 유니폼은 (땀을)짜가면서 달려야 한다. 그러나 신발은 한번 신으면 레이스 도중 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만약 선수들간의 충돌로 신발이 벗겨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순위경쟁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황영조는 “내가 금메달을 딴 직후 아식스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신발이라며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 큰 돈을 번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황영조는 이어 레이스 직후 손기정 선생이 털어놓은 비화도 소개했다. “메인스타디움 스탠드에서 대형 전광판을 통해 레이스를 지켜보신 손 선생님이 ‘황영조와 모리시타 둘 중 하나는 도로에 고꾸라질 것이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치열한 레이스로 패자는 탈진해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한편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에는 아식스 대신 소속사 코오롱의 액티브화를 신고 금빛 레이스를 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