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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향문(香紋)
성터 거닐다 주워 온 깨진 질그릇 하나
닦고 고이 닦아 열 오른 두 볼에 대어 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곳에 무르녹는 옛 향기라
질항아리에 곱게 그린 구름무늬가
금시라도 하늘로 피어날 듯 아련하다
눈감고 나래 펴는 향그러운 마음에
머언 그 옛날 할아버지 수염이
아주까리 등불에 비치어 자애롭다
꽃밭에 놓고 이슬 받아 책상에 올리면
그 밤 내 베갯머리에 옛날을 보리니
옛날을 봐도 내사 울지 않으련다
김종길, 낙화부(落花賦)
내 하루
꽃 핀 고원(故園)을 찾아오니
바람도 없이
깊어가는 낮이련만
꽃은 한없이 지기만 하더라
꽃그늘 사느란 돌 골라 앉아
꿈속처럼 고요히 노래를 가르는
내 어깨에
여인의 손길처럼 내려앉는 꽃잎
모자도 없이 바람에 날리는
내 머리에
꽃은 차례차례 와서
그러나
내 가슴속에 핀 꽃
외로이 피어난 그 꽃도 마저
나는 져 버리란다
길이길이 져 버리련다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어려서 나는 램프불 아래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전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장만영, 소쩍새
소쩍새들이 운다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뒷산에서도
앞산에서도
소쩍새들이 울고 있다
소쩍새가
저렇게 많이 나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일러 주시는 그 사이에도
소쩍소쩍 솥이 작다고
소쩍새들은 목이 닳도록 울어 댄다
밤이 깊도록 울어 댄다
아아, 마을은
소쩍새 투성이다
서정윤, 바람이여
바람이고 싶어라
그저 지나가 버리는
이름을 정하지도 않고
슬픈 뒷모습도 없이
휙 하니 지나가 버리는 바람
아무나 만나면
그냥 손잡아 반갑고
잠시 같은 길을 가다가도
갈림길에서
눈짓으로 헤어질 수 있는
바람처럼 살고 싶어라
목숨을 거두는 어느 날
내 가진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니고
육체마저 벗어두고 떠날 때
허허로운 내 슬픈 의식의 끝에서
두 손 다 펴보이며 지나갈 수 있는
바람으로 살고 싶어라
너와 나의 삶이 향한 곳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슬픈 추억들 가슴에서 지우며
누구에게도 흔적 남기지 않는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어라
바람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