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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순례의 서(書)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을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이형기, 귀로(歸路)
이제는 나도 옷깃을 여미자
마을에는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된 저녁상을 받고 앉았을 게다
지금은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
한 오큼 내 각혈의
선명한 빛깔 우에 바람이 불고
지는 가랑잎처럼
나는 이대로 외로워서 좋다
눈을 감으면
누군가 말없이 울고 간
내 마음 숲 속 길에
가을이 온다
내 팔에 안기기에는 너무나 벅찬
숭엄(崇嚴)한 가을이
아무데서나 나를 향하여 밀려든다
신석정, 망향의 노래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 어린 손자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강경화, 공주에 내리던 비
어제는 감나무 아래 비가 오더니
꿈에 양철지붕을 두드리던 비소리가 모여
오늘은 시냇물을 이루네
물가에서는 어머니 염불소리도 들리고
여러 고장을 떠돌다 온 아버지
넋두리도 들리고
감나무엔 목을 맨 내 누이
달빛 아래 흔들리던 치마폭도 보이네
상여가 나가던 날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을 튕기며
열살 난 나는 사촌형 목소리로 말했지
누가 이렇게 슬픈 세상을 만들었을까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슬프게 만들었을까
갈대 자욱한 숲길로 형이 가듯
내 알던 이들은 가고
감나무 밑에는 날마다 비가 내린다
들판에 아무도 없는 길에 비가 내린다
김남조, 목숨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사람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고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 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 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건
그 모든 하늘이 낸 선천(先天)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