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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들길
모내기 끝낸 들에
치자꽃 향기 퍼진다
그 향기 따라
어린 모 뿌리를 잡는 들길 걷는다
바람은 솔솔 불어
길 옆 가득 피어나는 개망초꽃
그 숱한 흔들림으로 걷는다
흔들리며 걷는 게
어찌 또 들길뿐이랴
발자국 저벅일 때마다 뚝 뚜욱
그치는 개구리 울음에 젖어 걷는다
울며 젖어 걷는 게
어찌 또 들길뿐이랴
걷다보니, 보아라
바람은 자꾸 스쳐와
저 볏잎들 지극히 사운거린다
어린 모 땅맛에 젖어드는
저 기쁨의 떨림의 푸르른 몸짓
왜 우리에겐들 흐르지 않으랴
저만큼 산비얄의 나무들은
녹녹청청, 노을까지도 물들인다
그 물들임에 나도 물들어 걷노니
이제 산 우뚝 막아서서
돌아서 들 걸어든다
돌아서 걷는 이슬길에도
치자꽃 향기 그윽하여
모쪼록 그 꽃과 향기 몇 점
주막의 술잔에 띄우고 싶다
이용악, 막차 갈 때마다
어쩌자고 자꾸만 그리워지는
당신네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자
북에서도 북쪽
그렇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와버린 것인데
산굽이 돌아 돌아 막차 갈 때마다
먼지와 함께 들이켜기엔
너무나 너무나 차거운 유리잔
최승호, 아마존 수족관
아마존 수족관 열대어들이
유리벽에 끼어 헤엄치는 여름밤
세검정, 길
장어구이집 창문에서 연기가 나고
아스팥트에서 고무 탄내가 난다
열난 기계들이 길을 끊이면서
질주하는 여름밤
상품들은 덩굴져 자라나며 색색이 종이꽃을 피우고 있고
철근은 밀림, 간판은 열대지만
아마존 강은 여기서 아득히 멀어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목마르다
변기 같은 귓바퀴에 소음 부엉거리는
여름밤
열대어들에게 시를 선물하니
노란 달이 아마존 강물 속에 향기롭게 출렁이고
아마존 강변에 후리지아 꽃들이 만발했다
김광규, 왼손잡이
남들은 모두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고
글씨 쓰고
방아쇠를 당기고
악수하는데
왜 너만 왼손잡이냐고
윽박지르지 마라 당신도
왼손에 시계를 차고
왼손에 전화 수화기를 들고
왼손에 턱을 고인 채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느냐
험한 길을 달려가는 버스 속에서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어야 하듯
당신에게도 왼손이 필요하고
나에게도 오른손이 필요하다
거울을 들여다 보아라
당신은 지금 왼손으로
면도를 하고 있고
나는 지금 오른손으로
빗질을 하고 있다
박재삼, 어떤 귀로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에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