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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병(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김종길, 바다에서
차운 물보라가
이마를 적실 때마다
나는 소년처럼 울음을 참았다
길길이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나의 해로(海路)가 일렁일지라도
나는 홀로이니라
나는 바다와 더불어 홀로이니라
일었다간 스러지는 감상(感傷)의 물거품으로
자폭(自暴)의 잔(盞)을 채우던 옛날은
이제 아득히 띄워보내고
왼몸을 내어맡긴 천인(千仞)의 깊이 위에
나는 꽃처럼 황홀한 순간을 마련했으니
슬픔이 설사 또한 바다만 하기로
나는 뉘우치지 않을
나의 하늘을 꿈꾸노라
황석우, 봄
가을 가고 결박 풀려 봄이 오다
나무 나무에 바람은 연한 피리 불다
실강지에 날 감고 날 감아
꽃밭에 매어 한 바람 한 바람씩 당기다
가을 가고 결박 풀어져 봄이 오다
너와 나 단 두 사이 맘의 그늘에
현음(絃音) 감는 소리, 타는 소리
새야 봉오리야, 세우(細雨)야, 달야
곽재구,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정희성, 물구나무서기
뿌리가 뽑혀 하늘로 뻗었더라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들으니
입이 열이라서 할 말이 많구나
듣거라 세상에 원
한 달에 한 번은 꼭 조국을 위해
누이는 피 흘려 철야작업을 하고
날만 새면 눈앞이 캄캄해서
쌍심지 돋우고 공장 문을 나섰더라
너무 배불러 음식을 보면 화가 먼저 동하니
남이 입으로 먹는 것을 눈으로 삼켰더라
대낮에 코를 버히니
슬프면 웃고 기쁘면 울었더라
얼굴이 없어 잠도 없고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쌀을 훔쳤더라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고
멀리 고향 바라 울었더라
못 살고 떠나온 논바닥에
세상에 원
아버지는 한평생 허공에 매달려
수염만 허옇게 뿌리를 내렸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