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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강변 바닥에 돋는 풀
강변 바닥에 돋는 풀, 달리는 풀
미끄러지는 풀
사나운 꿈자리가 되고
능선 비탈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꽃들
고개 떨구고 힘겨워 조는 날
길가에 채이는 코흘리개 아이들
시름없는 놀이에 겨워 먼 데를 쳐다볼 때
온다, 저기 온다
낡은 가구를 고물상에 넘기고
헐값으로 돌아온 네 엄마
빈 방티에 머리 베고 툇마루에 누우면
부스럼처럼 피어나는 동네 꽃들
가난의 냄새는 코를 찔렀다
정호승, 우물
길을 가다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낮달을 초승달로 던져놓았다
길을 가다가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홀로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평화시장의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풀어
쑥떡 몇 개를 건네주셨다
너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신경림, 까치 소리
간밤에 얇은 싸락눈이 내렸다
전깃줄에 걸린 차고 흰 바람
교회당 지붕 위에 맑은 구름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싸락눈을 밟고 골목을 걷는다
큰 길을 건너 산동네에 오른다
습기찬 판장 소란스런 문소리
가난은 좀체 벗어지지 않고
산다는 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
몸부림 속에서 따뜻한 손들
들판에 팽개쳐진 이웃들을 생각한다
지금쯤 그들도 까치 소리를 들을까
소나무 숲 잡목 숲의 철 이른 봄바람
학교 마당 장터 골목 아직 매운 눈바람
싸락눈을 밟고 산길을 걷는다
철조망 팻말 위에 산뜻한 햇살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어디선가 멀리서 까치 소리
마종기, 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 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속에 누워서 한 백 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박두진, 하늘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론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