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나태주, 귀소
누구나 오래
안 잊히는 것 있다
낮은 처마 밑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던
생솔가지 태운 냉갈내며
밥 자치는 냄새
누구나 한 번쯤
울고 싶은 때 있다
먹물 와락
엎지른 창문에
켜지던 등불
두세두세 이야기 소리
마음 먼저
멀리 떠나보내고
몸만 눕힌 곳이 끝내
집이 되곤 하였다
박목월, 회수(回首)
나의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린 날의
모래톱이며
냇물이며, 앓는 밤의
출렁이는 검은 물결이며
첫사랑이며
쫓다가 놓쳐 버린 사슴
그것은
나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흔적으로
달이 있다
달빛에 비춰 보는 빈손
그리고
산마루에서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사슴이 있다
좀생이 별 아래서
고개를 돌리고
영원히
나희덕, 땅끝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좇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 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은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세영, 지상의 양식
너희들의 비상은
추락을 위해 있는 것이다
새여
알에서 깨어나
막, 은빛 날개를 퍼덕일 때
너희는 하늘만이 진실이라 믿지만
하늘만이 자유라고 믿지만
자유가 얼마나 큰 절망인가는
비상을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진흙밭에 뒹구는
낱알 몇 톨
너희가 꿈꾸는 양식은
이 지상에만 있을 뿐이다
새여
모순의 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