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손제섭, 옛집
돌확으로 눌러둔 한 사람이 있어서 오는 길이 멀었다
늙은 감나무 그늘은 여전한데
누군가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듯한 환각
물고랑이 나 있는 마당을 몇 발짝 걷는다
이마를 덮는 풀
담장 밑으로 분꽃 몇 포기
틈새가 벌어진 마룻장에 사지를 뻗치고 눕는다
이내 처연해지고
눈두덩이 붉어지는데
잠시, 무언가 나무라는 귀에 익은 잔소리들
맨낯을 감싸주던 곤한 손
나지막이 달래주던 말
한때는 닦고 또 닦았던 옛집 마루에
어둠이 들어선다
등허리가 점점 써늘해지고 껌껌해진
한참 뒤
돌확 밑에 숨겨둔 한 사람
여직 기척이 없어
눈 꾹 감고 혼자 돌아가는 길이 또 무거울 것이다
이애경, 천원역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천원역과 만나네
노량역 지나 송정리역 다음 나주역에서 내려야 하지만
나는 천원역에서 슬쩍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지폐는 애들도 시큰둥 한다는데
차창 밖 들녘은 천 원이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나풀나풀 유혹하고
뻥튀기처럼 부푼 행복이 숨어있을 것 같기도 한
가난한 나는 그만 이 역에서 내리고 싶네
천 원짜리 밭뙈기나 부쳐 먹고
들녘 하늘에 매달린 노을이나 아침 햇살 주워 먹으며
저 자라는 청보리처럼 살고 싶네
바람을 지집 삼아 옆구리에 끼고
덤으로 준다는 별빛이나 달빛이며를
평생 이웃하며 희희낙락 살고 싶네
나부끼는 바람과 한 바탕 몸을 썩고 나면
내 몸도 그만 투명한 날개 한 쌍 달지 않겠나 싶은 게
뚝뚝 번지는 석양 아래 고단한 날개를 접고
긴 잠에 들면
내 생 언저리가 더 없이 부드럽겠다 싶은 게
자꾸만 입 안 가득 초록물이 도는 것이네
김미선, 비 갠 항구의 거리
비 갠 오후 통영 항구의 거리는
비린내 먼저 풍기고 흰 페인트가 눈부시다
간물 씻어 내린 바다에 푸른 물결 넘실대면
한낮의 갈매기는 은빛날개 반짝이며
바다를 물고 허공에서 끼룩거린다
비 그치고 물비린내 번지는 오후
설레는 가슴 사랑을 잠재울 수 없으리
생생한 창밖 저 항구로 달려가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물결 속
소용돌이 거쳐 구름다리 건너간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미륵산에 올라
홍백 깃발을 들고 망을 보다가
멸치 떼가 몰려오면
소리소리 치며 붉은 깃발을 흔들어
연안에서 먼 바다로 전파선을 보낸다
최승호, 에스컬레이터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부채가 큰 부자이거나
부채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거나
천천히 혹은 빠르게 죽음에 인도되기까지
올라가고 또 내려오며
펼쳐지고 다시 접히는 계단들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궁둥이가 큰 바지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밑에서 쳐다보거나
고개돌려 저 밑계단의 태아들을 굽어보거나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서두를게 하나도 없다 저승열차는
늦는 법이 없다, 막차가 없다
이재무, 저 못된 것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멘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