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나뭇잎 하나
크낙산 골짜기가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미처 몰랐었다
뒷절로 가는 길이 온통
주황색 단풍으로 물들고 나뭇잎들
무더기로 바람에 떨어지던 때
그러니까 낙엽이 지던 때도
그곳을 거닐면서 나는
느끼지 못했었다
이렇게 한 해가 다 가고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던 날
앙상한 대추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문득 혼자서 떨어졌다
저마다 한 개씩 돋아나
여럿이 모여서 한여름 살고
마침내 저마다 한 개씩 떨어져
그 많은 나뭇잎들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면서
남재만, 명함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
기억도 없는 명함들이
내 서랍에 수두룩하다
그걸 준 사람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버려야겠다며
찢어버리려니 그 중 하나가
도무지 찢겨지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난 그 명함을
호주머니에 소중히 넣고 다닌다
질기고 매끄러워
구두주걱으로 쓰기
안성맞춤이기에
신현정, 토끼에게로의 추억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김성옥, 사람의 가을
예전에는
너에게로 가는 길이
급하고 어지러웠으나
이제 나는
더디게 갈 수 있고
또한 편하게 갈 수 있다
낙엽마저 다 떨쳐버리고
흔들려 쓰러지지 않는
덩치 큰 나뭇등걸로 남아
하늘을 향해
몸 하나로 버틸
아름다운 가난이 있으니
비워서 가볍게
너에게로 간다
문무학, 그냥
'그냥'이란 말과 마냥
친해지고 싶다 나는
그냥그냥 자꾸 읊조리면
속된 것 다 빠져나가
얼마나 가벼워지느냐
그냥그냥
또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