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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엽, 유리창
이 아침, 내 뜰 안을 팽팽하게 채운 안개
닦으면 닦을수록 일어서는 투명한 벽
잊고 산 얼굴 하나가 물방울로 흘러내리고
밖은, 갓 헹구어 낸 빨래 같은 풍경들
바람 따라 도막도막 박음질로 수런대고
눈 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빗물 또는, 폭설에도 지워지지 않은 문신
갈아 끼운 계절 따라 왜 혹처럼 돋아나는지
아직도 등을 맞대고 선 왼손과 오른손
차라리 내 몸에 걸친 불을 꺼 보았다
길은 사방으로 더 선명하게 뻗어 있고
마침내 무너진 벽으로 달빛 가득 차온다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不在)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오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이재무, 빈 자리가 가렵다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 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 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 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 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 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손남주, 흙발
변두리 비탈밭이 가뭄에 탄다
아프게 껍질을 깨는 씨앗
물조로의 물도 목이 마르고
덮었던 마른 풀 걷어내자, 후끈
숨 막히는 흙냄새 사이 노란 떡잎
무거운 흙덩이 이고
푸른 뜻 굽히지 않는다
힘겨운 고개
세상이 아무리 짓눌러 와도
하늘 보고 꼿꼿이 일어서는
흙발 지그시 디디고 섰다
안도현, 둘레
이 술잔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입술을 갖다 대고 술을 마실 수 없었겠지
그래, 입술에 둘레가 없었다면
나는 너를 사랑할 수도 없었을 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하고 같이 술 마실 일도 없겠고
술잔 속에 보름달이 뜨지도 않겠지
저 보름달에 둘레가 없었다면
아무도 찐빵을 만들어 먹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찐빵에 둘레가 없었다면
그 뜨거운 찜통 속에서 부풀어 오르다가
멈추어야 할 때를 잊어버렸을 걸
그렇다면
보름달이란 무엇인가
찐빵이 하늘로 솟아올라 둘레를 갖게 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