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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기, 겨울 바다의 화두
겨울 바다의 화두
책 좀 읽으라신다
파도책을 펼치면서
수천 권의 시집을 던지면서
제대로 된 시 한 편 쓰라신다
부끄럽다
받은 시집을 펼치면 바다보다 더 넓은데
해변에서 어휘만 줍고 있다
시 한 줄 연결 못해 전전긍긍이다
독기 품은 시 한 편 쓰려면
파도처럼 부서져야 하리
허연 채찍에 갈기갈기 찢어져야 하리
더도 덜도 말고
파도 같은 시 한 편 쓰라신다
최명란, 다시, 묵비
이승의 일
저승 가서도 고자질 마라
당장 잡혀갈 놈 수두룩하다
저승 가면
어떤 일도 말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일러주지 말라고
그들은
솜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말 날까 봐 소리 새어 나올까 봐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았다
나는 죽었다
증거 인멸을 위하여
내 주검 속에 들어 있는
그 많은
말 못할 사리들
허소미, 갈대의 변명
바람의 동향을 알고 싶어
오늘의 이슈에 잠시 잠깐 몸 맡긴 것뿐인데
흔들흔들 흔들린다고? 흔들리며 산다고
쉽게 단정 지어 버리는 인식의 한계
구렁이 담 넘어가는
세상살이 묘수도 제법 나이테로 마디져 있다
언제가는 홀로 설 꿈꾸고 있다는 것을
그 꿈 언저리를 세상이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는 이 있을까
보이는 것밖에 보여 주지 못하는
하얗게 부려지는 슬픔
최영미, 그대에게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 거야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한 놈인지 두 놈인지
오늘은 그대가 내일의 당신보다 가까울지
비평가도 모를 거야
그리고 아마 너도 모를 거야
내가 너만 좋아했는 줄 아니
사랑은 고유명사가 아니니까
때때로 보통으로 바람피는 줄 알겠지만
그래도 모를 거야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건 습관도 뭣도 아니라는 걸
속아도 크게 속아야 얻는 게 있지
내가 계속 너만을 목매고 있다고 생각하렴
사진처럼 안전하게 붙어 있다고 믿으렴
어디 기분만 좋겠니
힘도 날거야
다른 여자 열 명은 더 속일 힘이 솟을 거야
하늘이라도 넘어갈거야
그런데 그런데 연애시는 못 쓸걸
제 발로 걸어 나오지 않으면 두드려 패는 법은 모를걸
아프더라도 스스로 사기 칠 힘은 없을걸, 없을걸
이승엽, 꽃 진 자리
아내가 출산을 했다
떨어져 나간 아픈 흉터가 붉게 물들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중심을 잃어버린 몸이 하늘하늘
그러나 아내는 아프지 않다고 했다
낮에는 볕, 밤에는 별과 달이 따뜻한 어머니 품 같다고
산후조리 이만큼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아내는 거듭 괜찮다, 괜찮다고 했다
아내의 몸에 별꽃이 피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많이 다녀갔을까
아내는 건강한 사내아이의 울음처럼
봄바람 아지랑이 물결 따라
지금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