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정,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곰국을 끓이다 보면 더 이상 우려낼 게 없을 때
맑은 물이 우러나온다 그걸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뽀얀 국물 다 우려내야 나오는
마시면 속이 개운해지는 저 눈물이
진짜 진주라는 생각이 든다
뼈에 숭숭 뚫린 구멍은
진주가 박혀 있던 자리라는 생각도
짠맛도 단맛도 나지 않고
시고 떫지도 않은 물 같은 저 눈물을 보면
눈물은 뼛속에 있다는 생각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뭔가 시원하게 울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뽀얗게 우러나온다
박곤걸, 풀잎을 보며
내가 빈손을 하고
사람의 허세를 부린 탈을 벗는다 해도
바람에 누웠다 일어서는 풀잎만도 못하리라
빈손바닥에 풀물이 묻어난다
이순에 다시 쓰는 나의 시는
남루함이 비열함보다 좋았던 풀잎의 지조인가
입이 천근의 무게
귀를 만 리 밖에 떼어놓아도
나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만 리 밖에서 몰아쳐 온다
온몸에 풀물이 감돌고 있는지
풀잎이 누웠다 일어서며
손 저어 일러주는 말귀를 알 듯 말 듯 더 몰라라
박정대, 사곶 해안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횡행(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생
백령도, 백 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생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이수명, 공원에서
공원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모두 증발했다
공중에 떠 있는 건물들이 서로 부딪쳤다
나는 도피중인 수목들을 표시했다
내가 상속할 이 수목들을 모두 잊었다
숲의 은유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건들은 점점 흐려졌다
나를 데려가 주오
빛이 중얼거렸다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이 중얼거렸다
개 한 마리가 내 앞을 지나갔다
꼬리를 세우고 천천히 나를 지우며 지나갔다
나는 많은 개들을 그렸다
서로 에워싼 꼬리들과 발들을 그렸다
공원은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다
김상현, 눈길을 내며
눈을 쓸며 길을 냈습니다
되도록 멀리까지 길을 냈습니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길을 냈습니다
혼자 있기가 쓸쓸해서 길을 냈습니다
아무나 찾아올 수 있도록 길을 냈습니다
기다림을 위해 길을 냈습니다
길을 내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휘파람을 불면서 눈을 쓸었습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니 어느덧
내 속에도 정갈한 길 하나가 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