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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철, 길 위
널 안 보려니까 내가 아프다
그냥 그 길만 오고 갔다
길 위 가지만 남은 때죽나무 높고
그 위 섬광처럼 흰 구름 떴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동백 잎만
수북이 내렸다
박남수, 이 어둠 속에는
이 어둠 속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그 무엇들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둠이 걷히고
햇볕이 내리 번지면
그것이 꽃일 수도 있고
돌일 수도 있는 그 숱한 것이
그 숱한 것이 여기서는
그저 이름도 붙여줄 수 없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제 지닌 것들을 키우고 있다
이 날이 밝는 것을
그 누가 믿지 않으랴
그러나 그 누가
그 날을 점칠 수 있으랴
그것이 내일이어도
내명년이어도 그저 멀면서도
다가오는 것으로 믿으면서
우리는 외롭지 않으면
그저 외롭지 않다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이석현, 모래시계
기다림도 순간이다
가야할 길은
오직 하나
서두르거나 다투지 말자
뒤집어 바꿔놓고 보면
앞서 가는 너보다
내가 더 빠른 법
산다는 것은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천천히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복효근, 틈, 사이
잘 빚어진 찻잔을 들여다본다
수없이 실금이 가 있다
마르면서 굳어지면서 스스로 제 살을 조금씩 벌려
그 사이에 뜨거운 불김을 불어넣었으리라
얽히고설킨 그 틈 사이에 바람이 드나들고
비로소 찻잔은 그 숨결로 살아 있어
그 틈, 사이들이 실뿌리처럼 찻잔의 형상을 붙잡고 있는 게다
틈 사이가 고울수록 깨어져도 찻잔은 날을 세우지 않는다
생겨나면서 미리 제 몸에 새겨놓은 돌아갈 길
그 보이지 않는 작은 틈, 사이가
찻물을 새지 않게 한단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벽도
양생되면서 제 몸에 수 없는 실핏줄을 긋는다
그 미세한 틈, 사이가
차가운 눈바람과 비를 막아준다고 한다
진동과 충격을 견디는 힘이 거기서 나온단다
끊임없이 서로의 중심에 다가서지만
벌어진 틈, 사이 때문에 가슴 태우던 그대와 나
그 틈, 사이까지가 하나였음을 알겠구나
하나 되어 깊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실금의 틈, 사이를 허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 노여움의 불길과 내 슬픔의 눈물이 스며들 수 있게
서로의 속살에 실뿌리 깊숙이 내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