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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외도
음력 스무날
거제도에 가면 다른 섬 외도에 갈 수 있다
뱃삯은 망치해안에서 담아온 안개 한 가방
거스름 돈은 지세포 바람 한 줌
포말 갑판에 올라
풀잎 등대를 바라보라
녹슨 몸통에 소주를 주유하고
마음의 온도를 일 도 높이면
이내 기관이 가열하여 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리고
외도에 다녀와선 외도를 말하지 말라
달빛항구 안개부두 외도행 여객선은
말하는 순간 이미 사라졌으므로
이병률, 화양연화(花樣年華)
줄자와 연필이 놓여 있는 거리
그 거리에 바람이 오면 경계가 서고
묵직한 잡지 귀퉁이와 주전자 뚜껑 사이
그 사이에 먼지가 앉으면 소식이 되는데
뭐 하러 집기를 다 덜어내고 마음을 닫는가
전파사와 미장원을 나누는 붉은 벽
그 새로 담쟁이 넝쿨이 오르면 알몸의 고양이가 울고
디스켓과 리모컨의 한 자 안 되는
그 길에 선을 그으면 아이들이 뛰어노는데
뭣 때문에 빛도 들어오지 않는 마음에다
돌을 져 나르는가
빈집과 새로 이사한 집 가운데 난 길
그 길목에 눈을 뿌리면 발자국이 사라지고
전봇대와 옥탑방 나란한 키를 따라
비행기가 날면 새들이 내려와 둥지를 돌보건만
무엇 하러 일 나갔다 일찌감치 되돌아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퉁퉁 눈이 붓도록 울어쌌는가
이영식, 바다에서 시인에게
파도가 바위를 친다
함묵의 북, 두드려 억만년 잠 깨우려한다
저를 허물고 바람을 세우는 파도
낮고 낮아져 모음만으로 노래가 되는 시를 쓴다
시인이여
바다라는 큰 가락지 끼고 도는 푸른 별에서
그대, 시인이려거든
바다 건너는 나비의 가벼움으로 오라
비유로 말고 통째로 던져 오라
애인이자 어머니이며 삶이고 죽음인
바다를 사랑하라
근원에서 목표까지 온전히 품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정신을 적시는 바다
모래톱에 밀려온 부유물들을 보라
모든 것 다 받아준다고 바다가 아니다
마실수록 갈증이 되는 허명(虛名)
껍데기로 뛰어든 것들 잘근잘근 씹어 내뱉는
허허바다
오늘도 어느 해류는
목마른 편지가 든 유리병 하나를 실어 나르기 위해
입 꼭 다문 채 온밤을 흐른다
황지우, 여기서 더 머물다 가고 싶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밥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장사 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끔만 더 머물다 가자
천영애, 시를 지으며
저녁마다 시를 짓는다
오늘 하루도 엿같은 날이었구나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들
술집 어디서 골아 떨어져
내가 그리워한 것만큼 그리워하다가
입술 닿은 술잔 깨물어 먹다가
드디어 사랑해버리기를
살아서 고달픈 사람들
멸치 대가리 씹어먹으며
사랑해 버리기를
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이
미칠 수 있는지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구나
그렇게 악담해대며 저녁마다
시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