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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익, 또 다른 생각
뭉개지는 것도 방법이다
세상을 사는 데에는
내가 각을 지움으로써 너를 편안하게
해줄 수도 있다. 선창에서
기름때 묻은 배끼리 서로 부딪치듯이
부딪쳐서 조금 상하고 조금 얼룩도 생기듯이
그렇게, 내 침이 묻은 술잔을 네가 받아 마시듯이
자, 자, 잔소리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
취한 기분에 붙들려 소리를 버럭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시간도 참으로 소중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도 소중하다
시퍼렇게 가슴에 날을 세우고
찌를 듯이 정신에 각을 일으켜
스스로 타인 절대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내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을 배신하고 모반하는 일은
네게는 매우 소종한 덕목이다
안락한 일상의 유혹을 경계하고 저주하라, 그대
불행한 시인이여
서정윤, 사는 방법
내 사랑은 잠시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순간의 화려한 눈부심 뒤에
긴 어둠, 많은 꿈을 견딜지라도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우리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불꽃의 흔적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이다
안용태, 섬진강 나들이
소풍간다
벽진국민학교 사십회 동기생들
졸업하고 사십년만의 나들이다
자식새끼 키운다고
남해 고속도로 들머리 산불처럼 벗겨지거나 숯이 된 가슴
번데기 된 누에처럼 반백 년 지어 놓은
고치를 풀어 한이든가 눈물이든가
쌍계사 가는 길 섬진강에 풀어 본다
늦봄, 꽃은 지고
꽃 진 자리가 아파 피멍든 벚꽃나무 바라보며
전라도와 경상도 아우르는
화개 장터를 피 토하듯 게워낸들
어디 한번 간 청춘 다시 오겠냐만
시샘할라치면 명줄 긴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반백년 비바람에 옥자야, 질호야 이기 뭐꼬
잘 익은 참외처럼 우리네 얼굴
강물 같은 깊은 주름
분칠로 지우려 성형을 지우려 낙망 말아라
저기 저 절집 삼나무처럼 우리네 아이들 사철 푸르지 않으냐
오늘은 다 벗어 두고 술이나 마시고 노래나 부르자
여즉 고생 많이 했다 아이가
오세영, 사랑
잠들지 못하는 건
파도다. 부서지며 한가지로
키워 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가지로
지켜내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거부하는 칼
김창제, 나사
내 마음에 박혀 있는 나사
조이면 조일수록
서로가 단단해지는 힘
산이 푸르름을 당기고
하늘이 구름을 당기고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면서 조이고 있네
매양 오른쪽을 겨냥하면서 당기고 있네
세월에 헐거워진
사랑을 조이고
조금 행복한 일상을 조이고
그리운 곳으로 추억을 당기네
꽃이 꽃에게
사랑이 사랑에게
수나사는 암나사에게
암호 같은 날카로운 나사산으로 비벼 간다
안개의 윤활유로 산은 매끄럽게 대지에 박히고
꽃은 붉게 나뭇가지에 박히고
내 사랑 심장에 박히고
조이면 조일수록 더 단단해지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