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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뜨거운 돌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화상(火像)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 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이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이장욱, 소규모 인생 계획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이재훈, 어느 저녁의 풍경
매달린 시간들을 툭툭 털어버리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아직
저물지도 않은 해를 마주하고
서쪽 길에 엉켜 마구 접혀버리고 있다
매달린 하루 종일이 점점 더 윽박지르듯 조인다
지탱하고 있다는 건
아직 너를 다 들어 올릴 수 없다는 것
아무 일이 없었을 짐작의 끝에서
텅 비어있는 집이 발코니 문의 소리를 연다
치자꽃 향기의 소리를 연다
비어있는 곳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를 것들이
재빠르게 손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심장의 한쪽을 건드렸다
어둑하다는 것의 질감으로 쓱쓱 문지르며
하늘을 놓아주며, 단지 놓아주는
고수(鼓手)의 북채
김상현, 오월
나와 봐
어서 나와 봐
찔레꽃에 볼 부벼대는 햇살 좀 봐
햇볕 속에는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려고
멧새들도 부리를 씻어
들어봐
청보리밭에서 노는 어린 바람 소리
한 번 들어봐
우리를 부르는 것만 같애
자꾸만 부르는 것만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