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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원, 그 여름, 복날에
어린 시절에 목격한 야만의 추억
바로 그 대추나무다
설핏 부는 바람에 곤두박질치던 내 연(鳶)을
관처럼 쓰고 있던 그 대추나무다
검둥이는 목이 비끌린채 매를 맞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목소리라도 높이면
으르렁 기세를 세우던 목을
수천 번도 더 쓰다듬었던 목덜미를
머슴들은 매달았다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교문을 나서는 내게
바지가랑이 잡으며 꼬리치던 검둥이가
그날따라 보이지 않더니
거기 매달려 사정없이 맞고 있었다
누군가가 울며 몸부림치는 내 어깨를 짓눌렀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검둥이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매달린 검둥이처럼
오늘같은 복날이면
친구들은
뛰는 메뚜기처럼 젓가락을 움직이는데
40년 전 검둥이 눈물이나 떠올리며
내 젓가락은 동그라미나 그린다
이태수, 다시 사랑을 위하여
모두들 남을 위하여
가슴을 연다고 한다
목숨을 바쳐서 이웃을 구하고
이 뒤틀린 사회를
어둠의 나라를 일으켜
새롭게 세운다고 한다. 목에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지른다. 자기 하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웃과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그런데 유독 그는
말이 없다. 풀이 죽어 바보처럼
말에 떠밀리어
앉아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남들을 위해 술잔을 기울인다는
사람들 틈에 끼어
그는 그저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그들을 향해 중얼거린다
누가 누구를 위하고 있는지
이 시대에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왜 자기를 남이라고 부르면서
남을 짓이기고 있는지
따스한 가슴이 없는 시대의
이 소음 소음 소음, 어둠의 소용돌이여
사랑을 잃은 세월의 앙금이여
그리운 사랑의 나라
사랑의 마을이여
송수권, 쪽빛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때늦은 순비기꽃 몇 송이 막 피어나고
신신한 아침 햇빛 입을 대다
기절한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무심히 조약돌을 던지면
팽팽한 수평선이 입을 벌리고
바다는 서슬진 유리처럼 퍼어런
금이 선다
아무도 없다
저 물 밖 물쟁이로 떠돌다 온 세월
이젠 떠나지 않으리라
내 영혼 속에 잠든 바다
쪽빛 물발로 깨워서 당신의 이름
뜨겁게 부르리라
정호승, 종이학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두고 날아간다
봄비 그친 뒤
지리산으로 가보라
지리산 능선 위에
학이 앉아 웃고 있다
도종환, 멀리 가는 물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