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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천, 어쩌면 오늘이
하루 종일 보채던 아이가
한밤중에 품속으로 파고든다
엄습하듯 생각의 먼 후대를 불러들이는 너
너를 안고 불 꺼진 오늘을 천천히 걸어본다
납작해진 너를 안으면 안을수록
내가 나를 안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내가 아니라 너라는 생각
자고나면 다시 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너는 눈을 또렷이 뜨고
무거워진 밤을 자꾸만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밤은 깊고 또 깊어져
이 밤의 공기를 다시 만질 수 없는 때도 있어서
오늘이 백년의 기억보다 더 깜깜하고
그때마다 후대의 아주 먼 생각이
가만히 왔다
가만히 가는 중이라고 중얼거렸다
권경인, 감포
떠도는 영혼은 언제나 포구에서 길을 잃는다
여기까지 끌고 온 길은
또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할 길이냐
긴 세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을
좁은 바닥의 비릿한 살 냄새
배고프면 파도는 더 많이 출렁거리고
갈매기도 먹이 앞에선 자유롭지 못한 것을
양철지붕 파이도록 의문에 잠 못 이루던 그 누가
신열에 들떠 눈 부릅뜬 채 여기 섰던 것이냐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여도 벅차기만 한
떠나온 길은 떠나갈 길
아이들은 자라 서울로 가고
서울사람 이곳에서 잠시 횟감에 빠졌다간 달아나는데
내장을 다 발리고도 펄떡이는 동해의 한 자락을
묵묵히 밟고 서서
누가 오래도록 해진 그물을 깁던 것이냐
상처는 건드리면 커지는 것인지
좀체 속을 보이지 않는 무표정 속의 아득한 욕망을 적시는
밤 가득 후줄근한 등불꽃
사람들은 멋대로 취하고
파도는 저 혼자 더 먼 곳으로 나가 길을 잃는다
공영구, 오늘 하루
모처럼 저녁놀을 바라보며 퇴근했다
저녁밥은 산나물에 고추장 된장 넣고 비벼먹었다
뉴스 보며 흥분하고 연속극 보면서 또 웃었다
무사히 하루가 지났건만 보람될 만한 일이 없다
그저 별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라고 자책하면서도
남들처럼 세상을 탓해보지만
늘 그 자리에서 맴돌다 만다
세상살이 역시 별 것 아니라고
남들도 다 만만하게 보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살라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 생각났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것이 별 것도 아닌 곳에서
별 것처럼 살려고 바둥거리니 너무 초라해진다
한심한 생각에 눈감고 잠 청하려니
별의별 생각들 다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오늘 하루 우리 가족
건강하게 잘 먹고 무탈한 모습들 보니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워
행복의 미소 눈언저리까지 퍼진다
김용택, 빗장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시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달아도 내달아도
속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박칠근, 배드민턴 치는 근린공원
해는 서산에 앉아 기웃대는데
창밖은 한낮의 무늬로 아른거린다
근린공원 한 모퉁이에
코스모스는 모여서 꽃 피우고
두 사람은 떨어져서 배드민턴 치고 있다
돈독하려고 애 쓰거나
상대의 헛점 노리지 않는다
손길 미치지 않는 곳에 퍼지른 아쉬움
발걸음 먼저 불거진다
보내는 마음이 곡선이고 간격 있어서 유연하다
반쯤 열린 창문 틈에 비스듬히 걸쳐있는 망중한
불현듯 깃털 한 점의 깨우침이
선연(鮮姸)한 곡선 그으며 날아든다
가까이 있어도 좋지만 저처럼
떨어져 있는 게 복욱(馥郁)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