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흐린 눈으로 보네
닿을 곳 알지 못한 채
걸어 들을 지나고
걸어 마을과 숲을 지났네
때로 강을 만나고
저물녘 붉은 하늘을 만났네
무른 땅에 서서 오래 바라보는 동안
날 선 이를 가진 짐승들 발끝 할퀴고
내 몸은 더뎌 시간 쉬 흘렀네
이제 눈 흐리고 귀 어두워
어눌한 입 닫고 고개만 끄덕이네
걸어온 길 조금씩 지워져 가네
세상 조금씩 멀어져 가네
원무현, 저녁 무렵
저물녁 해가 미루나무에 걸터앉아 햇살을 헹굽니다
어릴 적 물고기가 빠져나간 손가락 사이로 노을
노을이 올올이 풀려 떠내려갑니다
누런 광목천 하나로 사철을 건너신 어머니
어머니께 꼭 끊어드리고 싶었던
비단폭 같은 냇물을 움켜쥡니다
이제는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 텅 빈 굴뚝을
우렁우렁 넘어오는 부엉이 울음이 맵습니다
조행자, 하오 6시의 풍경
하오 6시의 황혼은
길 밖에 길이 있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언제나
그 길 안에서 황홀해한다
그 길 위로 알 수 없는 노래, 기타소리가
흘러가고
그 길 위로 알 수 없는 인기척, 기침소리가
지나가고
그 길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추억
은사시나무 그림자 사이로
한때의 격정이 끓어오르고
믿음의 산책로를 걷기 위해 신을 신는 황혼의 발
내 포켓 속 짤랑거림도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
하오 6시의 명백한 이끌림
나는 아름답고 은밀한 속삭임만을 엿듣는
세상의 귀가 되고 싶다
잘 익은 풍경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최동룡, 시하늘
별이 가득합니다
꽃밭입니다
철들어
우주의 치마폭에
떨군 눈물
캄캄한 생
문득
우러르면
당신은 희망입니다
이규리, 수평선
세상에서 가장
긴 자가 수평선을 그었으리라
허리나 목을 백만 번 감아도
탱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푸른 현
내 눈에도 수평선이 그어졌다
바다를 떠나와서도 자꾸 세상을 이등분하는
저 높낮이와 명암들
수평선 건져내어 옥상에 걸면
오래 젖어온 생각도 말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