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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마드모아젤 사강' 23회 ㅡ19금 절때로 아님
게시물ID : lovestory_899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낭만아자씨
추천 : 1
조회수 : 57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1 11: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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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아듀, 마드모아젤 사강 23 / 낭만아자씨



 그 일 이후로 나는 공식적으로는 뽕브라더스를 버렸다. 정태놈은 내가 깡패는 되지 않게 됐다며 좋아했다.  

 얼굴이 엉망인지라 시내 출입은 당연히 할 수가 없었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 나를 위해서 매일처럼 정태놈이 자취방으로 왔다. 부기는 며칠 만에 빠졌지만 멍까지 완전히 없어지는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주말에도 집에 가지 못했다. 공부하느라 갈 시간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쌀 도둑질은 못했지만, 돈 쓸 일이 없으니 크게 아쉽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낮에 왔다 갔고, 그런 날은 일부러 기서행 막차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때 만일 어머니가 형편없는 내 몰골을 봤다면 분명히 혼절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때 나는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연작들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베꼈다. 이문구의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유려한 문체와 솔제니친의 간결한 단문을 내가 추구할 전범으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큰사전에서 순우리말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모조리 외울 생각이었다. 시작하면서부터 순우리말만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확신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글을 쓰기로 했나 싶었던 것인지 정태놈은 뛸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웬걸, 이후 점점 속도가 느려져서 몇 년에 걸쳐 그 작업은 계속됐고, 16절 갱지로 앞뒤 빽빽하게 300매가 넘었으나, 이후 여러번의 이사 중에 없어지고 말았다. 게을러 빠진 내가 제대로 외우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 작업을 끝낸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뽕브라더스를 버렸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화실에 가서 창주형에게 기타를 배우거나, 정태놈하고 놀거나, 여자애들을 만나러 다녔다. 

 단언컨대 지금도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있는 것은 열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정은 목표를 정하고, 정한 목표로 나아가는 힘이다. 노력은 열정이 부려먹는 도구이고, 노력을 이끌고 나가는 힘이 열정이다. 열정이 없는 노력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아주 작은 충격과 장애물 앞에서도 후퇴하고, 주저앉을 준비가 돼 있는 것이 노력이다. 노력은 원래부터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다. 인간의 본능은 에덴동산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고, 거기다 원하는 여자와 원하는 남자까지 항상 옆에 있는 것. 그것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본능을 거스르는 데는 반드시 의지가 필요하며, 그 의지를 뒤에서 밀어붙이는 것이 열정이다.

 나는 이 열정이 아예 없거나 미약했다. 열정도 타고 나는 것일까?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를 닮았는데 나만 유독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열정의 화신이었다. 일이 남아 있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식구들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달빛 아래서도 남은 일을 했다. 반면, 아버지는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조금 하다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조금 하다가는 막걸리 한 잔 먹고, 그랬다. 술 친구가 지나가 주기를 바랐으며, 누가 지나가다 말이라도 걸면 얼씨구나, 하고 따라가서 밤이 깊어서야 취해서 귀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골호인으로 불렸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고생을 하고 살았다.

 또, 열정 없는 사람은 자신의 열정 없음에 대한 핑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 * * *

 가을이 되고 정태놈이 '모나코'에 DJ가 됐다. '모나코'의 사장인 창주형의 동네 후배 유정이 누나가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모나코'는 무포에서 제일 크고, 가장 유명한 음악다방이었다. 제 딴에 팝송 좀 듣는다는 무포 젊은이들은 모두 '모나코'를 알고 있었다.

 정태놈에게 배정된 시간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낮 11시에서 1시까지였다. 손님이 제일 적은 시간이었다. 놈이 받는 돈은 한 끼 밥값 정도였다. 그러나 왕초보가 '모나코'에 DJ가 됐다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처음에 유정이 누나의 약혼자인 재우형은ㅡ이 냥반이 '모나코'의 실질적인 사장이었다ㅡ 정태놈이 어리다고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디션을 보고는 놈의 실력에 입을 벌렸다고 한다.  

 오디션에 따라가지 못했던 나는 놈의 첫 출근(?) 날, 당연히 따라갔다. 나는 놈에게 첫 '리퀘스트'를 날리는 사람이 되는 역사를 만들어야 했다. 평일 그 시간에 네 넘은 학교엘 안 가고 어떻게 거기에 갔느냐고 물을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앞만 보고 학교를 다녔을 추억 빈곤한 학창시절을 보낸 범생이 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가슴이 갑갑하지만 어쩔 것인가. 내 글을 이해할 넘들은 아예 읽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서글픔을 뒤로 하고 계속하련다.

 내가 지각, 조퇴, 결석을 하는 데에는 35000가지의 핑계가 있었다.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 소싯적에 고인이 되신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는 항상 현재진행형으로 위독했으며, 불쌍한 삼촌과 사촌들은 수시로 비명 또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야 했고, 시집가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누나들도 내 안전한 결석을 위해 시집을 다시 가야 했다. 이것 말고도 핑계가 천지베까리였지만 시간관계상 생략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밉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깡촌인 우리 마을(기서면 내동)엔 이장집에도 관용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당장은 확인이 어렵다 해도 담임선샘들이 사후에라도 확인서를 요구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속아 주자고 작정하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과 선샘들도 나를 밉상으로 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뽕브라더스를 버린 뒤에도 공부는 하지 않고 지각과 조퇴, 결석을 일삼았으므로 선샘들은 여전히 내가 뽕브라더스를 실질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선샘들은 내가 실질적으로 뽕브라더스를 움직이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써낸 숱한 반성문에서 드러난 철학이랄까, 인생관이랄까는 도저히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엉뚱하기는 해도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뽕브라더스 시봉넘들은 졸업할 때까지 패싸움이나 술과 담배 때문에 문제였지, 집단폭행이나 성폭행 같은 죄질이 극악한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것도 선샘들은 나 때문이라고 믿는 눈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할 때까지 시봉넘들이 큰 말썽을 부리면 교무실에 같이 불려갔다. 나는 묵묵히 반성문을 썼다. 반성문이 아니라면 글을 거의 쓰지 않았던지라 그렇게라도 글을 쓰고 싶기도 했고, 또 다른 계산도 있었다. 

 어쩌다가 야구방망이 등으로 맞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맞을 뻔 하기도 했다는 것이 맞겠다. 나는 항상 제일 앞에 섰다.

 선샘이 방망이를 돌리면서

 "뻗으라, 임마!"

 하면 나는 그때부터 두 손으로 엉덩이를 싸잡고 울상을 짓는다.  

 "와? 똥 쨀겠나, 자슥아? 니, 맞기 싫어가 연극하는 거 다아 안다. 뻗으라, 임마!"
  
 "선샘요, 함 봐주시머 안되는기요? 궁디에 쫑기 났니더."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고 엄살을 부리면 대부분 거기서 상황이 종료되곤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뭐라, 또 쫑기라? 니 궁디는 쫑기 집합소가, 임마! 맨날 쫑기 나나? 까봐라, 자슥아!"

 선샘의 말에 따라 누드에는 자신 있던 나는 서슴없이 바지를 내린다. 주사 가능지점까지 바지를 내리면 다른 선샘이 말한다.

 "이누므 시키 봐라! 빤쓰를 안 입고 댕기네! 노 빤쓰네, 노 빤쓰! 여자 노 빤쓰 이야기는 들어도 남자 노 빤쓰는 못 들었다, 이누므 시키야!"

 "우리집 가난해가 빤쓰 못 삽니더."

 내 대답에 또 다른 선샘이 말한다.

 "이누므 시키, 즈그집 못 살기는. 니 똥가다쟁인 거 시내 가시나들 다 알드라, 이누므 시키야!"

 "아, 그거요? 글마 그거 상고 댕기는 제 종동생입니더. 글마 저하고 똑같이 생겨가꼬 울엄마도 못 알아 봅니더."

 "이누므 시키,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일마 이거 빤쓰도 안 입고 준비하고 있다가 바로......"  

 그러나 선샘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자인지라 차마 '바로 들이대려고 그런 거 아니냐' 고 하지는 못한다.

 "선샘요, 더 내리가 진짜로 보여 드리까요?"

 "더럽어 죽겠다, 이누므 시키야! 주봉 올리라!"

 그러면 상황종료였다. 물론 내 엉덩이에는 종기가 없었고, 선샘들도 우리만 단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재수가 없는 날은 진짜 맞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엄살 대마왕이 아닌가.  

 나는 맞기 전부터 요래조래 시간을 끌다가 한 대 맞았다 하면 데굴데굴 구르고, 폴짝폴짝 뛰면서 헐리우드 액션을 완성했다. 내 오도방정을 보고 웃지 않을 선샘은 없었다. 그러면 또 상황종료였다. 웃으면서 체벌할 교사가 어딨겠는가.

 "다음에는 정학이다, 이누므 시키들아!" 

   아니면  "다음엔 퇴학이야, 이누므 시키들아!"  

 이런 경고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내가 시봉넘들이 맞지 않게 해준 매도 도합 만 대는 넘을 것이었다.


   ㅡ24회에 계속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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