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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천양희, 사라진 것들의 목록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박경조, 밥 한 봉지
쉬이 뜸 들지 못한 또래들 표정에 섞여
뭉게뭉게 부푸는 목요일의 정오
큰 솥의 멸치다시국물 우려질 동안 깨순이며
참비름 살짝 데쳐 무치고
봄배추 삶아 된장국거리 버무려 놓고
생고등어 한 상자 튀김옷 입히면
복지관 담장 따라온 해묵은 이팝나무도
갓 지은 100인분의 막막한 기대 뜸 들이느라 분주하다
자원봉사자가 수저와 배식판 한 순배 돌리는 사이
귀먹은 끝순할매 오늘도 잽싸게 다음 한 끼니의 밥덩어리
또래들의 눈치까지 덤으로
검은 비닐봉지에 꼭 꼭 감추는 거 훔쳐보고 말았다
살아가는 힘
저토록 처절하게 감추는 거구나
끝내는 죽음과도 묶여야 할 맹렬한 저 매듭 옆에서
자꾸만 얼룩얼룩 뜨거워지는 내 목구멍
박정만, 저 높푸른 하늘
저 높푸른 하늘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그것은 나에게 군말만 있었기 때문
이제 철 지난 눈으로 저 하늘의 푸른 땅을 보나니
버리라 하면 다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다려보자
왜 생의 한나절은 내게 없으며
걸어가는 길섶에는 좋은 꽃도 없는지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아, 이제 알겠어
나는 언제나 되돌아오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지
바람과 달과 구름은 끝이 없는데
난 그저 오금 박힌 걸음으로 걸어온 거야
저 높푸른 하늘을 좀 봐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
아무렴 저 꼭두서니 빛을 보라니까
저녁 산의 이마 위에
높푸른 하늘의 맑은 빛이 마냥 걸려서
내 꿈과 저승길로 걸어오는 걸
걸어와서 슬픔의 한 빛깔로 물드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이것이 아닌 것 같아
박노해, 첫 마음
한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있다
첫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 마음으로
이상이, 노을
눈물 없이 우는 것들은
저렇게 붉다
마른 울음은 뜨거워서
마음을 태우고 데이는 불길이라서
차마 누가 달랠 수도 없어서
내 마지막 기원은
너에게 낙인찍히는 것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고
너의 한이 되는 것
어둠이 큰 손으로 틀어막을 때까지
너에게 들키고 싶어 활활 우는 저녁
마음을 엎질러놓고
달디 단 죄를 저질러놓고
온몸으로 판 벌이는 피울음
영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피의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