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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진실, 반어적 진실
꽃은 떨어지기를
순결은 더럽혀지기를
기록은 깨어지기를
문은 열리기를
벽은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침은 저녁을
가을은 겨울을
삶은 죽음을
이 시대는 저 시대를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고
때없이 들고나던 철조망에 할퀴어
갑자기 피 흘리는 오늘의 저녁놀
평상시가 비상시로
출입구가 비상구로
사랑이 미움으로 돌변하는 변덕도
도둑같이 온다고
알면 병 되고
모르면 약이 되는 진실된 거짓들
박해수, 바다에 누워
내 하나의 목숨으로 태어나
바다에 누워
해 저문 노을을 바라본다
설익은 햇살이 따라오고
젖빛 젖은 파도는
눈물인들, 씻기워 간다
일만(一萬)의 눈초리가 가라앉고
포물(抛物)의 흘러 움직이는 속에
뭇별도 제각기 누워 잠잔다
마음은 시퍼렇게 흘러간다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가 될까
물살이 퍼져감은
만상(萬象)을 안고 가듯 아물거린다
마음도
바다에 누워
달을 보고, 달을 안고
목숨의 맥이 실려간다
나는 무심한 바다에 누웠다
어쩌면 꽃처럼 흘러가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외로이 바다에 누워
이승의 끝이랴 싶다
김선굉, 저것이 완성일까
지는 후박나무의 잎을 바라본다
아주 느리게 시간이 개입하고 있었다
잎은 천천히 떨어졌으며
무슨 표정과도 같이
마치 무슨 순교와도 같이
몇 차례 의젓이 몸 뒤집으며
툭, 하고 떨어졌다
저것은 그러면 완성일까
어떤 완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완성으로 가고 있는 걸까
툭, 툭, 떨어져 쌓여 몸 뒤척이는
저 마른 잎들의 근심은
김철진, 그래도 잊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낡은 수첩 속의 희미한 이름이
나달에 지워져 생각나지 않는다
비릿한 포구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속눈썹 푸른 그림자 길게
젊은 날 꿈결처럼 울다 간 사랑도
이제는 낡은 화면처럼 흐릿하다
이름을 보며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
이미 몇 번이고 바뀌었을 전화번호의
낡은 벨 소리만 이명으로 울고 있다
잊혀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
누군가의 낡은 메모리 속에서
나도 지워지고 있을 거란 생각에
된서리 맞은 하나 겨울 잎새로 서럽다
언젠가는 어차피 잊혀질 목숨이지만
그래도 잊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상국,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 금지구역에서
좌회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택시기사가 핏대를 세우며 덤벼들었지만
나도 보험에 들었다
문짝이 찌그러진 택시는 견인차에 끌려가고
조수석에 탔다가 이마를 다친 남자에게
나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법대로 하자고 했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이나 죽음이 극적일수록
보험금이 높아질 것이고
아내는 기왕이면 좀더 큰 걸 들지 않은 걸 후회하며
그걸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가구를 바꾸며
이 세계와 연대할 것이다
나도 보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