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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최정례, 파헤쳐진 흙
파헤쳐진 흙이 있다
하수로를 따라 모형 산맥처럼 쌓여 있다
파헤쳐진 흙을 피해 멀리 돌아가며
사람들이 말한다
지저분해라 빨리 덮어버리지 않구
어둠속에서 끌려나와 흙은 어둡다
막 도착한 피안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쌓인 보도블럭 쪽으로
몰리며 밟힌다
침묵한다
당연히
파헤쳐진 흙은 다시 덮인다
덮여 봉해지고 관리된다
낯선 것은 제거돼야 하니까
도시 경관을 해친다고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콘크리트 아래 덮여져야 한다는
지배적 믿음으로
폭력적으로 쌓여 있지 못하고
오세영, 봄날
사립문 열어 둔 채 주인은 어디 갔나
산기슭 외딴 마을 텅 빈 오두막집
널어 논 흰 빨래들만 봄 햇살을 즐긴다.
추위 물러가자 주인은 마실 가고
한 그루 벚나무만 덩그러니 꽃 폈는데
뒷산의 뻐꾹새 울음 마당 가득 쌓인다
나종영, 노랑붓꽃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작은 풀이파리만한 사랑 하나 받고 싶었을까
나는 상처가 되었네
노란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사랑이 곧 상처임을 알았네
지난 봄 한철 햇살 아래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네 모습이 진정 내 모습임을
노랑붓꽃 피어 있는 물가에 서서
내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사랑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나는 상처를 사랑하면서 알았네
유하, 마라톤 주자
내 안엔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살고 있다
그 무의식의 운동성이 나를 달리게 한다
전언은 휘발하고 달리기만 남은 것이다
전언을 알려야 한다는 욕망은 속도를 만들고
속도는 다시 그 욕망을 욕망하는 기계를 생산했다
나의 달리기는 그 기계의 톱니바퀴 운동이다
속도는 속도를 일으킨 주인을 집어삼키고
무의미한, 숨 가쁜 호흡만을 확대 재생산한다
전언의 에너지는 텅 빈 관성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그 관성이 지금 내 몸의 기계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기계가 멈추면 나도 없다
정호승, 참회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 한 그루 심은 적 없으니
죽어 새가 되어도
나뭇가지에 앉아 쉴 수 없으리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나무에 물 한 번 준 적 없으니
죽어 흙이 되어도
나무뿌리에 가닿아 잠들지 못하리
나 어쩌면 나무 한 그루 심지 않고 늙은 죄가 너무 커
죽어도 죽지 못하리
산수유 붉은 열매 하나 쪼아 먹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초승달에 한번 앉아보지 못하고
발 없는 새가 되어 이 세상 그 어디든 앉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