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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창재, 백수론
호랑이가 앞이마에 ‘왕(王)’자를 새기고도
바람에 수염을 맡기며 홀로 외롭듯
감춘 이빨. 감춘 발톱과 같이
무시로 드러내지 않는 법
뒤를 어슬렁거리되 기품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골짜기를 포효하되 주변을 다치지 않게 하며
먼발치에서 바라보아도 항상 위엄과 기백이 서려
배경을 따뜻하게 하는 풍경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고프고 주린 날이 오래오래 머물더라도
맑고 형형한 눈빛으로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눈발 휘몰아치는 매서운 들판에서도 한 겹 더
옷을 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을 피하지 않고 다수의 안녕한 질서 속으로
언제나 몸을 맡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정의의 함몰, 위선과 병폐 횡횡한 골목을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이빨과 발톱을 세워 분연한 일전을 불사하여야 한다
다만, 죽어서도
가죽을 남겨서는 아니 될 것이니
이수익, 열애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外道)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최하림, 내 시는 시의 그림자뿐이네
시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제치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송영목, 정직한 바람은 불어오는가
세상은 온통 바람이다
실바람, 남실바람, 정치바람, 치맛바람, 회오리바람
나비 등을 타고, 비를 동무하는 샛바람
마파람에게 눈 감추듯
거짓말이 말바꿈으로 장식되고
세풍, 북풍에 물살 짓는 가슴들
바람도 사람 따라 부는가
어느 때고 하늬바람은 시원하고
높새바람이 불 때는 봄을 그리게 된다
세상은 온통 바람인데
바람의 방향은 혼란스럽다
데모도 바람인가
시끄럽고 우울하다
삶의 아름다움은 정직이다
정직한 바람은 언제 불어올 것인가
포플라가 서 있는 어느 마을이나
빌딩 숲 사이에서도 바람은 불어오고
우리들도 바람 따라 흘러만 가는데
우리들에게 절실한 것은 오직 정직한 바람뿐인데
김윤현, 고려엉겅퀴
고려엉겅퀴는
울음이 많아도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고
울음이 적어도 안으로 새겨두지 않는다
누가 뭐래도 삶은 울음의 연속이라며
속상해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리며
꽃잎에다 향기를 덧붙이려 하지도 않는다
세상만사 그대로 두려는 자세다
비장이와 혼동이 되어도
정영엉겅퀴와 비슷해도 개의치 않는다
망내(忘內) 망물(忘物)의 생이다
고려엉겅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