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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남겨진 가을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박재열, 독서
오늘 읽는 책 위로 얇은 유리 층 하나 파르르 떨리네
이걸 지층이라 부를까, 지진이라 부를까
아무리 지진에 자물통 채우고 책상 다리 찔러 침잠하려 해도
몸의 내밀한 소린 터파기처럼 유리 층을 부수네
책 속의 작은 꽃가마, 울컥울컥 행간을 헤치고 올라오네
우린 못 보아도, 댐이 무너지고, 몸 안의 들녘이란 들녘이 다 범람하는데
꼭 같은 페이지, 꼭 같은 모서리, 예사로운 앉음새
모두 겹꽃무리의 집단행동이라 속단하고
애써 침잠해 보려 하지만
통꽃무리들이 소나기처럼 우두둑, 유리 현관문을 두들겨
그래도 그냥 보통명사의 항의라고 속단하고
여느 때처럼 2쪽 다 읽고 3쪽 넘기며
그저 그런 거라고 귀 접어 둘, 정말 그저 그런 일일까
김경, 연애
나는 꽃의 슬픈 살갗을 가진 탕아
편식주의자인 사내의 불길한 애인
애초 그대와 내가 바닥없는 미궁이었을 때
얼마나 많은 바다가 우리의 밤을 핥고 갔는가
내 몸 어디에 앉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 미타산 저물 무렵처럼
나와 어떻게 이별할지 끙끙대는 어린 연애
유리창처럼 닦아주고 싶은 저, 나이 어린 연애의 등
투정할 새도 없이 그는 가고
흰 배롱나무 꽃자리에 백악기의 새처럼 앉아
나를 살피는 연애
아직 가보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의 정글, 정글도 늙어
그 늙은 정글의 늑골에 두리기둥 박는 일만 같아
밤이 미타산으로 엉덩이를 슬쩍 걸치듯
그대의 호명을 기다리는
껍질까지 벗어 던져야 돌아오는 연애
생의 난간 같은 연애
문태준, 역전 이발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했다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 있는 곳
역이 없는데 역전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이 살고 있고
말라 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최영철, 막걸리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허옇다가 폭포처럼 콸콸 쏟아지다가
벌컥벌컥 샘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것
한 잔은 얼음 같고 세 잔은 불같고
다섯 잔 일곱 잔은 강 같고
열두어 잔은 바다 같아
둥실 떠내려가며 기분만 좋은 이것
어머니 가슴팍에 파묻혀 빨던
첫 젖맛 같은 이것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