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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대결
큰눈 온 날 아침
부러져 나간 소나무들 보면 눈부시다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나도 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천양희, 하나밖에 없다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안, 밥알 하나
할머니한테 들은 고조할아버지 이야기
얼마나 가뭄이 지독했던지 먹을 게 없었다
어느 날 마루에 놓인 물동이 속에
밥알 하나 가라앉은 게 보였다
가난해도 양반 체면에
밥알 하나만 달랑 건져 먹는 건 욕이 될까 봐
물 한 동이를 통째 들이키셨다는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밥알 하나 가만히 떠올라 오는 이야기
허은희, 그것뿐이다
나는 찐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었고
너는 찐 감자를 설탕에 찍어먹었다
너도 나처럼 소금에 찍어 먹을 줄로
나는 알았고
나도 너처럼 설탕에 찍어 먹을 줄로
너는 알았다
우리는 찐 감자를 먹었다
정대호, 혼자서 기다리는
가끔은 오지 않는 사람을 한 없이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걸 생각지 말고
오늘도 그냥 책상에 앉아
가난한 편지를 쓰며
그 가난한 마음으로 가슴 따듯해질 수 있다면
가끔은 마음 한 곳이 텅 비어 있어
누군가 와서 채워주지 않으면
마음 아파할 때가 있지
혼자서 산길을 걸으며
누군가 옆에
그림자 하나쯤으로라도 서 있었으면 하는 때가 있지
가끔은 나도 창가에 앉아 마냥 기다리고 싶을 때가 있지
오지 않아도
올 것만 같아도
올 것 올 것 올 것만 같아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