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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희, 산길
산을 오릅니다
산기슭의 길은 넓고 편합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걸으며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간혹은 손을 잡고
마주보며 웃음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길은 좁고 가파릅니다
당신과 함께 나란히 걸을 수 없습니다
혼자 걷지 않으면 안됩니다
혼자 걷는 산길은 오를수록 비탈져
숨이 막힙니다
앞서 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가물거리며 사라집니다
마지막 길은 혼자라는 것을 처음으로 압니다
이기철, 까뮈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해
나는 한국의 경상도의 시골의 고등학생이었다
안톤 슈낙을 좋아하던
갓 돋은 미나리 잎 같은 소년이었다
알베르 까뮈, 그대의 이름은 한 줄의 시였고
그치지 않는 소나타의 음역(音域)이었다
그대 이름을 부르면 푸른 보리밭이 동풍에 일렁였고
흘러가는 냇물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그것이 못 고치는 병이 되는 줄도 모르고
온 낮 온 밤을 그대의 행간에서 길 잃고 방황했다
의거가 일고 혁명이 와도
그대 이름은 혁명보다 위대했다
책이 즐거운 감옥이 되었고
그대의 방아쇠로 사람을 쏘고 싶었다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열광과 환희는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으련다
아직도 나는 반도의 남쪽 도시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백 사람도 안 읽는 시를 밤 세워 쓰고 있지만
이 병 이 환부 세월 가도 아주 낫지는 않겠지만
이하석, 긴 나무의자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쓰러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 놓으면 의자는
제 깡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를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최두석, 성에꽃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보고
다시 꽃잎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숨결이던가
일 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변영숙, 아들, 딸아
핏줄이 뭔가
온종일 보고도 돌아서면 곧 바로
또 보고 싶은 건
내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 갚을 여가 없이
오로지 너희에게 사랑내림 했다만
지나고 보니
내가 준 사랑보다, 너희가 내게 준 기쁨이
더 더욱 컸구나
고사리 새순같은 손가락으로, 한 쪽 젖 조물거리며
꿀꺽 꿀꺽 신나게 젖물 넘기던 소리
지금도 귓가에 재잘대는데
어느새
나보다 더 큰 나무되어, 이젠
너희 그늘에, 편히 쉬고 싶구나
철든 너희 손, 약손이 되었구나
수시로 투정부려지고, 이유없이 눈물 쏟아지는 건
너희와의, 긴 이별 앞둔, 어리광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