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이윤경, 신문지 봉지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 식구가 머리를 맞대고 봉지를 만든다
쑤어 둔 밀가루 풀에선 단내가 난다
읍내서 얻어온 신문지엔
폭설에, 교통사고, 기름값 폭등 기사
그런 시끄러운 세상 이야기들은
가위로 자르고 풀을 발라 꾹 누르면
얌전한 봉지가 된다
봉지는 봄이 되면
하얀 배꽃 떨어진 자리
연하디 연한 어린 배를 감싸 안고
바람을 막고, 벌레를 막고
봉지의 빈 공간만큼
딱 그만한 배를 키우게 된다
봉지를 만들며
벌써 아버지 봉지 속엔
살찐 송아지 한 마리 들어가고
어머니 봉지 속엔
곗돈 한 뭉치 쑥 들어가고
오빠의 야무진 봉투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자전거가 들어간다
몇 개 안되는 동생과 내 봉지 속엔
하얀 운동화 한 켤레씩 들어있다
문성해, 여기가 도솔천인가
칠성시장 한 켠
죽은 개들의 나라로 들어선다
누렁개 흰개 할 것 없이 검게 그슬린 채
순대처럼 중첩되어 누워 있는 곳
다 부질없어라
살아서 쏘다니던 거리와
이빨을 드러내던 증오
쓰레기통 뒤지던 욕망들이
결국은 이 몇 근의 살을 위해 바쳐진 것이라니
뒹구는 눈알들은 바라본다
뿔뿔이 흩어져 잘려나가는 팔다리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날렵하게 춤추는 저 검은 칼을
이제는 검은 길을 헤매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
발길에 차여 절뚝거리는 일도
마음에도 없는 꼬리 흔드는 일은 더더욱
좌판들 위에서
꾸덕꾸덕해진 입술들이 웃는다
이제는 물고 뜯는 일 없이 한통속이 된
검은 개들의 나라에서
살아서 오히려 근심 많은 내가
거추장스런 팔다리 휘적이며 걸어간다
박재희, 공원 벤치
멀리서 산책을 하다가도
의자를 보면 앉고 싶어진다
의자에는 항상 누군가의 체취가 묻어 있다
한가한 오후 노부부가 쓸쓸함을 기대다 가고
아이들이 실 웃음을 흘리다 가고
그늘이 몰래 쉬었다 가고
가끔은 석양도 붉은 하늘을 끌고 와 놀다 간다
늦가을 날
의자 위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다
가난한 죽음이다
죽음도 의자를 보면 쉬었다 간다
이기철, 추운 것들과 함께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 삶일지라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천인절벽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는 망아지처럼
건너온 세월, 그 물살들 헤어본다 한들
누가 제 버린 발자국, 쓰린 수저의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가
독충이 빨아먹어도 아직 수액은 남아 나무는 푸르다
누구의 생이든 생은 그런 것이다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오란 새의 부리를 검게 만드는 일뿐
상처가 없으면 언제 삶이 화끈거리리
지나와 보면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
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계절을 이긴 나무들에게
너도 아프냐고 물으면
지는 잎이 파문으로 대답한다
너무 오래 내려다보아 등이 굽은 저녁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
세상의 온돌들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오늘 늦가을 지붕을 인다
곽재구,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그날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던 도중
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릴없이
무너지는 내 마음이
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그 많은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