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김광규, 늙은 소나무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동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 백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
이진홍, 진달래꽃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온 몸 구석구석
오들오들 그리움이 피었습니다
가슴 속 관류하는 고통의 핏줄
바위틈에 숨겨진 화려한 절망들이
봄바람에 터져서 피었습니다
향기로운 당신 말씀 가혹하여
함부로 찢어져서 빠알갛게
온 산에 철철철 흘렀습니다
공광규, 얼굴 반찬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구석본, 우리 시대의 사랑
2003년 4월 4일 12시 4분
당신은 대구광역시 순환도로를
100킬로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곳은 80키로가 제한 속도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나의 모습이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다
옆자리는 검게 지워져 있다
지워진 검은 잉크 밑에서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얼룩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누군가 우리들의 사랑을 찍었다
100킬로로 달리던 속도와 그 뜨거움 속으로
내닫던 사랑을 흑백으로 현상하여
6만원을 요구하고 있다
누군가 제한해 놓은 속도
그 속을 벗어나면
가차없이 현상되는 우리들의 사랑
송재학, 튤립에 물어보라
지금도 모차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 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차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 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차르트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 물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