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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선, 상처의 안쪽
호박 밑둥에 똬리를 받치며
어머니 말씀하셨다
병의 근원은 습함에 있는 거라고
늙은 호박을 가른다
좀처럼 칼이 먹히지 않는다
속은 분명히 비어 있을 터
이 버팀의 힘은 무엇일까
어머니, 수술대 위에 누워서
암 덩이를 들어내는 동안
나는 호박 가르던 그 순간을 생각했다
여린 씨앗들을 위해
모질어진 수밖에 없었던 생의 외피를
다만 질기다 무심했던 자식과
행여 그 속내 근심으로 읽힐까 봐
커다란 혹 달고서야 젖은 속 열어 보인
무던한 당신
공명으로 가는 길 그토록 깊어
내게 닿기까지 더뎠던 것인가
눅눅한 생일수록 쉬이 오지 않는 봄
진즉 똬리가 돼드리지 못한 자책과
피우지 못한 몇 겹의 꽃들이
벗은 몸 다시 입는 어머니 병실에서
허기처럼 삼 년을 붉다가 졌다
최재목, 허공의 얼굴
세수하다가 문득 두 손에 든
물을 바라보다가, 물 한줌 쥔 동안 비치다 깨어지고
다시 짜 맞춰지는 나를 보았네, 두 손과 얼굴 사이에서
은밀히 살아남은 허공의 물방울
물 한줌 쥘 동안 비치는 이목구비
그것마저 놓쳐 버리면 낱낱이 분해되거나
세상으로 흘러다닌 얼굴을 보았네
자신을 잊을 때까지 두 손과 얼굴 사이에서
떠오르다 가라앉는 물방울, 그러다가 그러다가
당장에 무슨 뾰족한 수도 없이
아주 잊혀져가는 얼굴을 보았네
이선영, 시든 꽃
저 꽃의 영혼은
추워서 방으로 들어갔단다
겨울 집밖을 나서다 보니
시든 꽃 한 송이
영혼이 저만 따뜻한 곳 찾아 들어가버린
아니면 시들어가면서 꽃이
영혼 먼저 들여보냈나
영혼이 놓아두고 간
시든 꽃잎들은
이제 아무데로나 떨어져내릴 것이다
추위를 견딜 마지막 힘조차 잃었는가
방 안에서 잠시 쉬었다
봄이 되면
다른 꽃을 찾아들리
꽃들은 끝내 시들고
시들지 않는 영혼만이 천년만년 새로운 꽃으로 옮겨다닌다
오규원, 칸나
칸나가 처음 꽃이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를 맴돌았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유안진, 말하지 않는 말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해 버릴까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 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 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 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