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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수식어
수식어라는 말 아시나요
아직 가까이 오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꽃 피지 않은 몸 그대로
나뭇잎 뒤에 숨어 있다가
그가 불러주기만 하면 한걸음에 달려가
밑천까지 죄 털어주는 여자
사방이 벽뿐인 세상
눈에 보이지 않는 벽까지 무너뜨리며
해골언덕을 오르는 사내의
왼쪽 가슴에서 둥둥 울리는 망치질소리
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를 게워냄으로써
마침내 스스로를 건져내는
저 빛나는 말씀
더 이상 닳아질 것도 없는
맨손이신 어머니
김정희, 목격
난데없는 소나기가 거리를 습격하네
양파장수 노파 양파자루를 끌어안고 지하도 입구로 뛰어드네
거친 빗줄기에 지하도 층계가 마구 밀려 내려가네
노파가 헛발을 딛네 비명소리 층계 끝으로 곤두박질치네
몸에서 뭉글뭉글 영산홍이 피어나네
수천의 꽃잎들 타오르네
푸드덕, 허구렁 속에서 까마귀 한 마리 솟구쳐 올라, 지하도가
술렁거려, 수만 겹의 떨림, 진저리치는 입들, 붉은 층계들이
층층층 밀려와, 끊임없이 터지는 까마귀 울음소리, 사람들
고막을 떼어버려, 노파가 딛고 온 발자국들 빗물에 쓸려 내려가
고요한 몸, 타오르는 영산홍 속에서 층계가 푸드덕, 날아 올라
앰뷸런스에 한 생(生)이 실려가네
순식간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것은
비는 사라지고 없는데
최영숙, 폐타이어가 있는 산책길
종점, 길은 언제나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막막하게
생의 변두리를 도는 자
외곽에서 중심을 구하는 자의 배경에는
벌판과 바람 길은 휘어져
어디에 닿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삶은 단지 스쳐가거나 봄볕에
살을 말리는 뿌연 것
어느 날 아주 먼 어느 날
우리가 인연이라 말하던 순간도 다 쓰고 나면
바람 빠진 폐타이어 닳아진 허울만 남아
한곳에 쌓일 것이다 재생의 날을 기다리며
우연한 봄날의 담에 기대다 보면
지나온 길의 어디쯤 진실도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들
먼지를 풀풀 날리며 덤프트럭이 지나고
갓 스물의 청춘이 노래한다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들판의 한끝 희망은 그런 대로
연명하기에 좋았으나 몸의 바퀴가 닳아 멈추었을 때
내 앞에 놓인 밥그릇 하나
햇살이 가득 담긴 사발을 놓고 조는 듯 깨이는 듯
등허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따뜻한 기운이 흐르고
길은 그때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김윤헌, 갈대
생각이 깊으면 군살도 없어지는 걸까
삶을 속으로 다지면 꽃도 수수해지는 걸까
줄기와 잎이 저렇게 같은 빛깔이라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묵상이 필요할까
물 밖으로 내민 몸 다시 몸속으로 드리워
제 마음속에 흐르는 물욕도 다 비추는
겸손한 몸짓이 꽃의 향기까지 지우네
김재진, 못
당신이 내 안에서 못 하나 박고 간 뒤
오랫동안 그 못을 뺄 수 없었습니다
덧나는 상처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당신이 남겨놓지 않았기에
말없는 못 하나도 소중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