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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인, 낮아서 오르는 길
바람은 무얼 하자는 것일까
공중에 끊임없이 제 새끼를 낳아 기르면서도
어느 것도 거느리는 법이 없다
빈 들판에서 신의 정수리까지
과거에서 미래까지
그 무엇도 편을 가르지 않는다
사람은 사는 동안 죽은 자에게서 많은 것을 얻지만
생각은 늘 자신을 향해 있을 뿐이다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새는
결국 제 목숨을 지키지 못한다
사람의 길이란 지상에서 가장 낮은 길이 아닐까
낮아서 오르는 길밖에 갖지 못한
슬픈 것은 점점 사랑할 시간이 적어진다는 것
그러나 더 슬픈 건
얻고 싶은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것이다
더는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침묵은 깊이를 더하고
어둠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건 어둠뿐
의식의 끝은 죽음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다
김은숙, 잠수연습
장마비라고들 하지, 이렇게 장엄하게
쏟아지는 하늘비를 장대비라고 하지
거침없는 위력으로 온 산하를 제압하는
소서를 이틀 앞둔 여름 아침 폭우 속
잠 같은, 꿈 같은, 바다 깊은 잠수 연습
천구백팔십일년 그러니까 십삼년 전
그해의 끝 깊은 겨울, 겨울 바다에서
내게 있어 넌 아픔이었다는 세 줄 엽서 보내와
시간의 흐름 너머 무채색 정지점 된
초췌한 그리움을 그리워한다
멀어진 시간만큼 명징한 초상
바다 위에 겹쳐 눕는 그리운 그리움
가눌 수 없는 무게의 추를 달은 물 속 깊은 잠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별빛 하나쯤 안고 살아야 한다는
소설 속 이야기에서, 내 가슴 속 별 하나 짚어 보았지
가슴 깊이 저며 오는 그리움 하나
빛나지 않는 슬픔으로 닦아 보았지
고두현, 사랑니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 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꽃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김소월,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당신이 하도 못잊게 그리워서
그리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잊히지도 않는 그 사람은
아주나 내버린 것이 아닌데도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가뜩이나 설운 맘이
떠나지 못할 운에 떠난 것도 같아서
생각하면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원태연, 고문
세상 모든
고통스러운 일
다 당신께
어느 하루
쉬는 날 없이
죽지 않을 만큼
몰아쳐 주길
그래서
어느 하루
작은 시간이나마
나를 찾아 주길
죄송하지만
그렇게라도
내가 보고파지길